7p.
그러니까 금요일 밤 시간대의 전철이란 으레 그렇다. 밀착을 넘어 연체동물의 빨판처럼 서로에게 흡착되다시피 한 생면부지의 몸 사이에 종잇장만 한 틈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마운. 누군가 입을 열거나 숨을 쉴 때마다 머리 위로 끼얹어지는 고기 누린내와 마늘 냄새 문뱃내에 들숨을 참더라도, 그 냄새가 닷새간의 노동이 끝났음을 알려주기에 안도하는 시간. 과연 내년에도 혹은 다음 달에도, 심지어 당장 다음 주에도 이 시간에 전차를 탈 수 있을지에 대한 실존의 불안을 잠깐이나마 접어두는 시간.
96p.
아이의 뺨과 귀 사이에 난 작고 귀여운 점을 보고 조각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걸린다. 아이의 팽팽한 뺨에 우주의 입자가 퍼져 있다.
한 존재 안에 수렴된 시간들, 응축된 언어들이 아이의 몸에서 리듬을 입고 튕겨 나온다. 누가 꼭 그래야 한다고 정한 게 아닌데도, 손주를 가져본 적 없는 노부인이라도 어린 소녀를 보면 자연히 이런 감정이 심장에 고이는 걸까. 바다를 동경하는 사람이 바닷가에 살지 않는 사람뿐인 것처럼.
손 닿지 않는 존재에 대한 경이로움과 채워지지 않는 감각을 향한 대상화.
100p.
"공주님 몇 살?" "여섯 살이에요." 여섯 살...... 강 박사의 딸은 여섯 살. 알면서 물었으나 굳이 아이의 목소리로 듣고 나니 '-쌀'이라는 발음에 맺힌 수분이 언제까지고 증발하지 않은 채 귓가에 맴돌 듯하다.
102~103p.
굳이 먹어보지 않아도 입안에 도는 감미, 아리도록 달콤하며 질척거리는 넥타의 냄새야말로 심장에 가둔 비밀의 본질이다. 우듬지 끝자락에 잘 띄지 않으나 어느새 새로 돋아난 속잎 같은 마음의.
108p.
몇몇 경찰이 거실로 이어진 피 묻은 작은 발자국을 보고 숨죽여 다가가서는 꼼짝 마, 소리와 함께 들이닥쳤다가 생포해야 할 범법자 대신 문 열린 베란다 밖을 멍하니 내다보는 아이와 그 아이가 앉은 자리에 흥건한 오물 및 피를 보고는 곧 어린애 발견, 이라고 외치며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담요로 소년을 둘둘 말았다. 보풀투성이의 까슬까슬한 담요에서 뽀얀 먼지가 일었는데, 그 먼지가 창밖에서 들어온 하얀 꽃잎과 난분분히 뒤섞여 이끼류의 향기를 사방에 흩뿌렸다.
127p.
하나하나 뽑아서 손가락 끝마다 꽃잎이 피어나면 좀 더 예뻐지겠지. 핏빛보다 고운 빨강, 세상에 다시없으니. 비록 공기에 닿자 거무칙칙해지더라도, 더러워지기에 오히려 깊고 잔혹한 빨강.
143p.
단둘이라니, 아들과 딸, 이 무한한 단순성과 합리성을 겸비한 한 쌍이라니. 간결 속의 풍요를 응시하고 그것에 익숙해질수록 소녀는 자기가 떠나온 곳이 돼지우리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어린 몸집에도 끼어 잘 데가 마땅치 않아 모로 누워 칼잠을 자고 막내 아기까지 같은 자세로 누나들의 가슴과 등 사이에 끼여 자다가 질식할 뻔했을 만큼 비좁고 더러워서만은 아니었으며, 치열한 아귀다툼과 함께 먹을 입만 남은 곳에서 공간과 곳간에 비례해 감당이 되지 않을 정도로 애새끼들을 싸질러놓은 친부모의 행위가 흘레만 붙여놓으면 꿀꿀거리며 새끼를 까는 돼지 같았다는 생각이, 당숙네를 보고서야 비로소 든 것이었다. 아이들이 한 무더기로 뒤엉켜 자는 일곱 평 집 안에서 부모는 대체 그 짓을 어디서 어떻게 하고 막내까지 뽑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던 데다, 누구나 그렇게 아이를 놓고 살아야만 하는 줄로 알고 이유 불문 아이란 아들이 나올 때까지 ⎯ 그 아들을 어디다 써먹을 건지는 나중에 생각하고 ⎯ 계속해서 낳는 게 당연한 줄로 알고, 그러다 집안이 더 심하게 기울어져서 당장 손 붙잡고 굶어 죽게 생겼으면 비로소 새끼들 가운데 누군가 제일 덜떨어지거나 얼굴이 못났거나 많이 처먹어대는 녀석을 골라 다른 데다 보내버리면 그만인, 근대화가 덜 된 무식쟁이들이 돼지 말고 다른 것으로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았다.
145~146p.
초저녁에는 언니가 피아노 치는 소리를, 저녁 식사 뒤부터 소등 전까지는 텔레비전 드라마 소리를 주워들으면서 소녀로서는 그 모든 소리를 귀동냥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우아한 생활이었다. 이 집 사람들은 악다구니를 쓰지 않았고 낮은 목소리로 다정하게 대화를 나눴으며, 언제나 가득 차서 신경 쓸 일이나 초조해할 일 없는 곳간이야말로
사람의 목소리를 그토록 조용하고 부드럽게 만든다는 게 어렴풋이 짐작되었다.
155p.
거기에 배가 든든해진 덕으로 이성을 찾고 생각해보니 2층 양옥 앞에 머리를 풀어헤치고 맨발로 엎드려 가족이 모두 사라졌음을 고하며 자비를 베풀어달라 한들 그들이 자기를 어여삐 여겨 받아들여줄 것 같지도 않았다. 일할 곳을 주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자 그전까지 자취를 감춘 줄로만 알았던 자존심이 스멀거리며 솟아 올랐다. 미쳤다고 거기를, 왜 돌아가?
256p.
집에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 간소하나마 가구와 여분의 옷과 주방용품 등의 세간붙이가 있었고, 그 사소한 것들이 나중 가선 부담이 되었으며 기실 부담이야말로 집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263p.
두목은 이미 움직이기 시작한 조직을 흩어버리거나 그 조직이 가는 길을 웬만해선 바꿀 수 없네. 그 점에 있어서는 조직의 가장 막냇동생과 다를 바 없지. 한번 구축된 조직은 더 큰 질서 안에 포섭이 되어버리고, 그다음부터는 그 질서가 조직을 움직이는 것일세. 기계의 부품이 모두 빠지고 더 이상 대체할 게 없어지기 전까지는 말일세. 물론 대체품은 소모되는 속도 못지않게 양산 속도도 빠르지.
285p.
아무리 구조가 단단하고 성분이 단순 명료하다 해도 사람의 영혼을 포함해서 자연히 삭아가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 존재하는 모든 물건은 노후된 육체와 마찬가지로 연속성이 단절되며 가능성은 협착된다.
287p.
평균수명이 아흔이든 백이든 그것이 노구 자체의 건강을 재는 척도는 되지 못한다. 평균수명이 높아진 것은 다만 죽음이 급습하는 시기를 과학과 의학이 지연시켰기 때문이고 그것은 효율이나 질을 완전 충족시키지 못한 채 생명 연장의 꿈에서 '연장'에 포인트를 맞춘 것으로서 평균수명 100세 시대의 노인이란 어디까지나, 소원을 빌 적에 '젊은 모습으로 예쁘게'라는 옵션을 잊어 주름 잡힌 얼굴과 휜 허리로 구차한 영생을 잇게 된 예언 무녀의 운명에 불과하다.
292p.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 하나의 존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영혼이라는 게 빠져나갔는데도 육신이 더 무거워진다는 것은.
<파과>에서 얻어 꼭 써보고픈 표현과 단어
* 조각(爪角) : 짐승의 발톱과 뿔이라는 뜻으로, 자신을 적으로부터 보호하여 주는 물건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톺다 : (1)억지로 기침을 하거나 숨을 쉬어 내뱉다. (2)뱉기 위해 속에서부터 끌어올리다.
* 불콰하다 : 얼굴빛이 술기운을 띠거나 혈기가 좋아 불그레하다. 사실 <죽은 등산가의 호텔>에서 알게 된 표현이지만 파과에도 있길래.
* 시뜻하다 : (1)마음이 내키지 않아 시들하다. (2)어떤 일에 물리거나 지루해져서 조금 싫증난 기색이 있다.
* 구들더께 : 늙고 병들어서 방 안에만 들어박혀 있는 사람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
* 포란하다 : 부화하기 위하여 암새가 알을 품어 따뜻하게 하다.
* 쑥대강이 : 머리털이 마구 흐트러져 어지럽게 된 머리.
* 시러베장단 : 실없는 말이나 행동을 낮잡아 이르는 말.
* 성마르다 : 참을성이 없고 성질이 조급하다.
* 소기 : 기대한 바.
* 방기 : 내버리고 아예 돌아보지 아니함.
* 지남력 : 시간과 장소, 상황이나 환경 따위를 올바로 인식하는 능력.
* 씨우적대다 / 씨우적거리다 : 마음에 못마땅하여 입 속으로 자꾸 불평스럽게 말하다.
* 흐리마리하다 : (1)말끝을 분명하지 않고 모호하게 하다. (2)생각이나 기억, 일 따위가 분명하지 아니하다.
* 넥타(nectar) : 과일을 으깨어 만든 진한 주스.
* 우듬지 : 나무의 꼭대기 줄기
* 난분분히 : 눈이가 꽃잎 따위가 흩날리어 어지럽게.
* 자귀 : 짐승의 발자국.
* 바특하다 : (1)두 대상이나 물체 사이가 조금 가깝다. (2)시간이나 길이가 조금 짧다. (3)국물이 조금 적어 묽지 아니하다(≒걸쭉하다, 되직하다).
* 버들눈썹 : 가늘고 긴 눈썹. 또는 그런 눈썹을 가진 사람.
* 옴쏙하다 : (1 형용사)물체의 바닥이나 면이 오목하게 쏙 들어간 데가 있다. (2 동사)작은 것이 입에 넣어져 맛있게 씹히다. 또는 작은 것을 입에 넣고 맛있게 씹다. (3 동사) 무서워서 기운이 질리다.)
* 강퍅하다 : 성격이 까다롭고 고집이 세다.
* 동동구리무 : 크림을 부르던 옛 말. 행상들이 북을 두 번 '동동' 치고 크림의 일본식 발음인 '구리무'를 외쳤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 코티분 : 국내에 처음으로 정식 수입된 외제 화장품.
* 흘레 : 생식을 하기 위하여 동물의 암컷과 수컷이 성적(性的)인 관계를 맺는 일.
* 만고 : (1)매우 먼 옛날. (2)아주 오랜 세월 동안. (3)세상에 비길 데가 없음.
* 백안시 : 남을 업신여기거나 무시하는 태도로 흘겨봄.
* 발로 : 자기의 죄와 허물을 여러 사람에게 고백하여 참회함.
* 에멜무지로 : (1)단단하게 묶지 아니한 모양. (2)결과를 바라지 아니하고, 헛일하는 셈 치고 시험 삼아 하는 모양.
* 실뚱머룩하다 : 마음에 내키지 아니하여 덤덤하다.
* 드팀새 : 틈이 생긴 기미나 정도.
* 기실 : (1)실제의 사정. (2)실제에 있어서.
* 팃검불 : 잡티가 많이 섞인 검불.
* 검불 : 가느다란 마른 나뭇가지, 마른 풀, 낙엽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 목홍빛 : 차나무를 끓여 우려낸 물과 같이 붉은빛.
소설책을 읽다보면 생경하거나 낯선 표현이 나와도 문맥상 어떤 의미인지 쉬이 알아듣곤 한다. 그런데 매번 이런 식으로 읽고만 넘어갔더니, 정작 내가 글을 쓸 때는 똑같은 단어와 표현만 되풀이하는 앵무새가 되어가고 있다. 앞으로는 꼭, 단어도 함께 정리하고 다시 한번 되뇌어야지. 엑셀에 가볍게 던져놨던 문장들을 다시 되짚어본다는 명목으로 또다시 한 번 읽고 마는 파과. 예순다섯 할머니가 주인공이라서 그런지 구병모의 다른 소설과는 달리 깊고 진한 문장들을 힘껏 사랑해.
7p.
그러니까 금요일 밤 시간대의 전철이란 으레 그렇다. 밀착을 넘어 연체동물의 빨판처럼 서로에게 흡착되다시피 한 생면부지의 몸 사이에 종잇장만 한 틈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마운. 누군가 입을 열거나 숨을 쉴 때마다 머리 위로 끼얹어지는 고기 누린내와 마늘 냄새 문뱃내에 들숨을 참더라도, 그 냄새가 닷새간의 노동이 끝났음을 알려주기에 안도하는 시간. 과연 내년에도 혹은 다음 달에도, 심지어 당장 다음 주에도 이 시간에 전차를 탈 수 있을지에 대한 실존의 불안을 잠깐이나마 접어두는 시간.
96p.
아이의 뺨과 귀 사이에 난 작고 귀여운 점을 보고 조각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걸린다. 아이의 팽팽한 뺨에 우주의 입자가 퍼져 있다. 한 존재 안에 수렴된 시간들, 응축된 언어들이 아이의 몸에서 리듬을 입고 튕겨 나온다. 누가 꼭 그래야 한다고 정한 게 아닌데도, 손주를 가져본 적 없는 노부인이라도 어린 소녀를 보면 자연히 이런 감정이 심장에 고이는 걸까. 바다를 동경하는 사람이 바닷가에 살지 않는 사람뿐인 것처럼. 손 닿지 않는 존재에 대한 경이로움과 채워지지 않는 감각을 향한 대상화.
100p.
"공주님 몇 살?" "여섯 살이에요." 여섯 살...... 강 박사의 딸은 여섯 살. 알면서 물었으나 굳이 아이의 목소리로 듣고 나니 '-쌀'이라는 발음에 맺힌 수분이 언제까지고 증발하지 않은 채 귓가에 맴돌 듯하다.
102~103p.
굳이 먹어보지 않아도 입안에 도는 감미, 아리도록 달콤하며 질척거리는 넥타의 냄새야말로 심장에 가둔 비밀의 본질이다. 우듬지 끝자락에 잘 띄지 않으나 어느새 새로 돋아난 속잎 같은 마음의.
108p.
몇몇 경찰이 거실로 이어진 피 묻은 작은 발자국을 보고 숨죽여 다가가서는 꼼짝 마, 소리와 함께 들이닥쳤다가 생포해야 할 범법자 대신 문 열린 베란다 밖을 멍하니 내다보는 아이와 그 아이가 앉은 자리에 흥건한 오물 및 피를 보고는 곧 어린애 발견, 이라고 외치며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담요로 소년을 둘둘 말았다. 보풀투성이의 까슬까슬한 담요에서 뽀얀 먼지가 일었는데, 그 먼지가 창밖에서 들어온 하얀 꽃잎과 난분분히 뒤섞여 이끼류의 향기를 사방에 흩뿌렸다.
127p.
하나하나 뽑아서 손가락 끝마다 꽃잎이 피어나면 좀 더 예뻐지겠지. 핏빛보다 고운 빨강, 세상에 다시없으니. 비록 공기에 닿자 거무칙칙해지더라도, 더러워지기에 오히려 깊고 잔혹한 빨강.
143p.
단둘이라니, 아들과 딸, 이 무한한 단순성과 합리성을 겸비한 한 쌍이라니. 간결 속의 풍요를 응시하고 그것에 익숙해질수록 소녀는 자기가 떠나온 곳이 돼지우리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어린 몸집에도 끼어 잘 데가 마땅치 않아 모로 누워 칼잠을 자고 막내 아기까지 같은 자세로 누나들의 가슴과 등 사이에 끼여 자다가 질식할 뻔했을 만큼 비좁고 더러워서만은 아니었으며, 치열한 아귀다툼과 함께 먹을 입만 남은 곳에서 공간과 곳간에 비례해 감당이 되지 않을 정도로 애새끼들을 싸질러놓은 친부모의 행위가 흘레만 붙여놓으면 꿀꿀거리며 새끼를 까는 돼지 같았다는 생각이, 당숙네를 보고서야 비로소 든 것이었다. 아이들이 한 무더기로 뒤엉켜 자는 일곱 평 집 안에서 부모는 대체 그 짓을 어디서 어떻게 하고 막내까지 뽑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던 데다, 누구나 그렇게 아이를 놓고 살아야만 하는 줄로 알고 이유 불문 아이란 아들이 나올 때까지 ⎯ 그 아들을 어디다 써먹을 건지는 나중에 생각하고 ⎯ 계속해서 낳는 게 당연한 줄로 알고, 그러다 집안이 더 심하게 기울어져서 당장 손 붙잡고 굶어 죽게 생겼으면 비로소 새끼들 가운데 누군가 제일 덜떨어지거나 얼굴이 못났거나 많이 처먹어대는 녀석을 골라 다른 데다 보내버리면 그만인, 근대화가 덜 된 무식쟁이들이 돼지 말고 다른 것으로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았다.
145~146p.
초저녁에는 언니가 피아노 치는 소리를, 저녁 식사 뒤부터 소등 전까지는 텔레비전 드라마 소리를 주워들으면서 소녀로서는 그 모든 소리를 귀동냥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우아한 생활이었다. 이 집 사람들은 악다구니를 쓰지 않았고 낮은 목소리로 다정하게 대화를 나눴으며, 언제나 가득 차서 신경 쓸 일이나 초조해할 일 없는 곳간이야말로 사람의 목소리를 그토록 조용하고 부드럽게 만든다는 게 어렴풋이 짐작되었다.
155p.
거기에 배가 든든해진 덕으로 이성을 찾고 생각해보니 2층 양옥 앞에 머리를 풀어헤치고 맨발로 엎드려 가족이 모두 사라졌음을 고하며 자비를 베풀어달라 한들 그들이 자기를 어여삐 여겨 받아들여줄 것 같지도 않았다. 일할 곳을 주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자 그전까지 자취를 감춘 줄로만 알았던 자존심이 스멀거리며 솟아 올랐다. 미쳤다고 거기를, 왜 돌아가?
256p.
집에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 간소하나마 가구와 여분의 옷과 주방용품 등의 세간붙이가 있었고, 그 사소한 것들이 나중 가선 부담이 되었으며 기실 부담이야말로 집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263p.
두목은 이미 움직이기 시작한 조직을 흩어버리거나 그 조직이 가는 길을 웬만해선 바꿀 수 없네. 그 점에 있어서는 조직의 가장 막냇동생과 다를 바 없지. 한번 구축된 조직은 더 큰 질서 안에 포섭이 되어버리고, 그다음부터는 그 질서가 조직을 움직이는 것일세. 기계의 부품이 모두 빠지고 더 이상 대체할 게 없어지기 전까지는 말일세. 물론 대체품은 소모되는 속도 못지않게 양산 속도도 빠르지.
285p.
아무리 구조가 단단하고 성분이 단순 명료하다 해도 사람의 영혼을 포함해서 자연히 삭아가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 존재하는 모든 물건은 노후된 육체와 마찬가지로 연속성이 단절되며 가능성은 협착된다.
287p.
평균수명이 아흔이든 백이든 그것이 노구 자체의 건강을 재는 척도는 되지 못한다. 평균수명이 높아진 것은 다만 죽음이 급습하는 시기를 과학과 의학이 지연시켰기 때문이고 그것은 효율이나 질을 완전 충족시키지 못한 채 생명 연장의 꿈에서 '연장'에 포인트를 맞춘 것으로서 평균수명 100세 시대의 노인이란 어디까지나, 소원을 빌 적에 '젊은 모습으로 예쁘게'라는 옵션을 잊어 주름 잡힌 얼굴과 휜 허리로 구차한 영생을 잇게 된 예언 무녀의 운명에 불과하다.
292p.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 하나의 존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영혼이라는 게 빠져나갔는데도 육신이 더 무거워진다는 것은.
<파과>에서 얻어 꼭 써보고픈 표현과 단어
* 조각(爪角) : 짐승의 발톱과 뿔이라는 뜻으로, 자신을 적으로부터 보호하여 주는 물건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톺다 : (1)억지로 기침을 하거나 숨을 쉬어 내뱉다. (2)뱉기 위해 속에서부터 끌어올리다.
* 불콰하다 : 얼굴빛이 술기운을 띠거나 혈기가 좋아 불그레하다. 사실 <죽은 등산가의 호텔>에서 알게 된 표현이지만 파과에도 있길래.
* 시뜻하다 : (1)마음이 내키지 않아 시들하다. (2)어떤 일에 물리거나 지루해져서 조금 싫증난 기색이 있다.
* 구들더께 : 늙고 병들어서 방 안에만 들어박혀 있는 사람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
* 포란하다 : 부화하기 위하여 암새가 알을 품어 따뜻하게 하다.
* 쑥대강이 : 머리털이 마구 흐트러져 어지럽게 된 머리.
* 시러베장단 : 실없는 말이나 행동을 낮잡아 이르는 말.
* 성마르다 : 참을성이 없고 성질이 조급하다.
* 소기 : 기대한 바.
* 방기 : 내버리고 아예 돌아보지 아니함.
* 지남력 : 시간과 장소, 상황이나 환경 따위를 올바로 인식하는 능력.
* 씨우적대다 / 씨우적거리다 : 마음에 못마땅하여 입 속으로 자꾸 불평스럽게 말하다.
* 흐리마리하다 : (1)말끝을 분명하지 않고 모호하게 하다. (2)생각이나 기억, 일 따위가 분명하지 아니하다.
* 넥타(nectar) : 과일을 으깨어 만든 진한 주스.
* 우듬지 : 나무의 꼭대기 줄기
* 난분분히 : 눈이가 꽃잎 따위가 흩날리어 어지럽게.
* 자귀 : 짐승의 발자국.
* 바특하다 : (1)두 대상이나 물체 사이가 조금 가깝다. (2)시간이나 길이가 조금 짧다. (3)국물이 조금 적어 묽지 아니하다(≒걸쭉하다, 되직하다).
* 버들눈썹 : 가늘고 긴 눈썹. 또는 그런 눈썹을 가진 사람.
* 옴쏙하다 : (1 형용사)물체의 바닥이나 면이 오목하게 쏙 들어간 데가 있다. (2 동사)작은 것이 입에 넣어져 맛있게 씹히다. 또는 작은 것을 입에 넣고 맛있게 씹다. (3 동사) 무서워서 기운이 질리다.)
* 강퍅하다 : 성격이 까다롭고 고집이 세다.
* 동동구리무 : 크림을 부르던 옛 말. 행상들이 북을 두 번 '동동' 치고 크림의 일본식 발음인 '구리무'를 외쳤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 코티분 : 국내에 처음으로 정식 수입된 외제 화장품.
* 흘레 : 생식을 하기 위하여 동물의 암컷과 수컷이 성적(性的)인 관계를 맺는 일.
* 만고 : (1)매우 먼 옛날. (2)아주 오랜 세월 동안. (3)세상에 비길 데가 없음.
* 백안시 : 남을 업신여기거나 무시하는 태도로 흘겨봄.
* 발로 : 자기의 죄와 허물을 여러 사람에게 고백하여 참회함.
* 에멜무지로 : (1)단단하게 묶지 아니한 모양. (2)결과를 바라지 아니하고, 헛일하는 셈 치고 시험 삼아 하는 모양.
* 실뚱머룩하다 : 마음에 내키지 아니하여 덤덤하다.
* 드팀새 : 틈이 생긴 기미나 정도.
* 기실 : (1)실제의 사정. (2)실제에 있어서.
* 팃검불 : 잡티가 많이 섞인 검불.
* 검불 : 가느다란 마른 나뭇가지, 마른 풀, 낙엽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 목홍빛 : 차나무를 끓여 우려낸 물과 같이 붉은빛.
소설책을 읽다보면 생경하거나 낯선 표현이 나와도 문맥상 어떤 의미인지 쉬이 알아듣곤 한다. 그런데 매번 이런 식으로 읽고만 넘어갔더니, 정작 내가 글을 쓸 때는 똑같은 단어와 표현만 되풀이하는 앵무새가 되어가고 있다. 앞으로는 꼭, 단어도 함께 정리하고 다시 한번 되뇌어야지. 엑셀에 가볍게 던져놨던 문장들을 다시 되짚어본다는 명목으로 또다시 한 번 읽고 마는 파과. 예순다섯 할머니가 주인공이라서 그런지 구병모의 다른 소설과는 달리 깊고 진한 문장들을 힘껏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