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사]<결혼식> 유튜브에서 우연히 만난 축사 필사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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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저에게 축사를 부탁하며

너무 딱딱하지도 않고 너무 가볍지도 않고 적당히 재밌고 적당히 감동적인,

그러니까 맛도 좋고 살도 빠지는 마법의 음식 같은 축사를 부탁했습니다.


조용한 성격의 저로서는 매우 부담스러운 자리이나

일평생 친구에게도 저에게도 이런 날이 두 번 다시 없을 것 같아

어렵사리 부탁에 응했습니다.


저와 영윤이는 한창 못생겼었던 스무 살 시절,

그것도 칙칙한 재수 학원에서 만났습니다.

함께 밥 먹고 산책하고 스티커 사진을 찍으며 수험생 시절을 견뎌냈고

각자 좌충우돌하며 대학 시절을 보냈습니다.


스물 한 살엔 무전여행이나 다름 없었던 제주도 여행을 배 타고 다녀오기도 하고 

서른 한 살엔 오지 탐험과도 같았던 중국 동북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었습니다.

제가 갓 입덧을 시작했을 때에는 임산부가 친구와는 절대 가지 않을 것 같은 경남 창녕 우포늪을,

그것도 한여름에 기어이 찾아가 때로는 없는 길을 만들며 걷기도 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신부 영윤이와 저는 매끈하고 우아한 길로는 잘 다니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무모하고 불편한 길을 함께하며 어쩐지 재밌다고 낄낄대기도 하고

무덤덤한 저는 그 불편함을 심지어 집에 와서야 깨닫기도 했습니다. 


그런 기쁨을 함께 한 친구가

드디어 신묘한 인연을 만나 결혼을 한다니 몹시 기쁘면서도,

다른 한편 문득 그 시절이 그리워집니다.



저에게 친구 영윤이는 오색빛깔 오방색지와도 같은 친구입니다.

영윤이가 원래부터 재주가 많아서인지

아니면 남자친구가 없던 기간이 길어 하나 둘 체득하게 된 재주인지,

여하튼 요리면 요리, 그림이면 그림, 노래면 노래, 사진, 외국어, 뜨개질이며 화초 가꾸기, 동물과의 교감까지.

열거하기 입 아픈 면면들이 참 많습니다.


오래 전부터 이 친구가 연애라는 진입 장벽만 넘으면

너무나 괜찮은 아내가 될텐데, 라는 생각을 늘 해왔었습니다.

그러던 차 저희 남편 역시 연애가 장벽인 참 괜찮은 동료이자 친구가 있다길래

옳다구나 만남을 주선했었던 것이죠.


이제 평생의 짝꿍 한정규님에게 장고한 세월 연마해 온

갖가지 잔재주들을 한껏 뽐내며 살기 바랍니다.



다음은 인생이나 결혼에 대한 조언이라면 거창하고

결혼 10년 차인 제 수준에서 간단한 삶의 팁을 말할까 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개발자의 아내로 사는 팁이라고도 할 수 있겠구요,

개발자들을 위한 아내 대처 매뉴얼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먼저 저의 아버지와 지금의 남편을 종단 연구한 결과

개발자의 남편들은 대개 성실하고 책임감 강하고 누구보다 신실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학습도 잘 되지요.


그러나 이런 많은 강점을 가진 이들에게

하나 작고도 치명적인 결함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인간 여자를 대하는 센스.

살다보면 분명히 갈등이 있고 싸우게 되는데 이때 이 작은 결함은 큰 불편함을 초래하곤 합니다.

아내가 뚱한 표정으로 "아, 몰라 저리가"라고 한다고 하여 저리 가 있으면 안된단 말이죠.

그러니 미리 서로의 상태가 최상일 때 아내와 상의하여 화날 때, 배고플 때, 잠이 부족할 때.

가장 난처한 '아내가 울 때'에 대한 대처 매뉴얼을 미리 마련해두면 좋겠습니다.


개발자 남편들은 대개 내면이 매우 알찹니다. 단지 센스만 조금 부족할 뿐이지요.

그럼에도 이 작은 흠으로 인해 모든 것을 다 갖다 버리고 싶은 순간이 올 수도 있겠지만,

침착하십시오. 하나씩, 하나씩, 단계별로 학습하면 버전 업 된답니다.


오늘 개발자 남편을 맞이한 영윤이에게 큰 축하와 함께

앞으로도 소소한 고충을 공유할 수 있을 것 같아 마음 한편 고소... 아니, 든든합니다.



끝으로, 몇 달 전 책에서 읽은 축사의 한 자락이 인상 깊어 이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나눌까 합니다.


오늘부로 부부가 되었지만 모든 것은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날은 배우자가 몹시 사랑스럽겠지만 또 어느 날은 그렇지 않은 날도 있겠지요.

어느 순간 도리와 의무에 파묻혀 서로의 소중함이 희미해져갈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나의 아내가, 나의 남편이 내가 모르는 힘든 싸움을 하루하루

어렵사리 견디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주십시오.

그런 연민의 마음으로 서로에 대해 배워가는 부부가 되기를 바랍니다.


서로에 대한 매뉴얼을 아주 촘촘하고 빽빽해질 때까지 채워 나가면서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출처 : 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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