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p. <수요곡선의 수호자> - 두 번째 독서
유희는 문득 희열을 느꼈다.
9-10p. <수요곡선의 수호자> - 두 번째 독서
영감은 오랫동안 고민해온 물음에 대한 직관의 답이다. 퍼즐이 맞춰지는 순간인 셈이다.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처럼 영감은 늘 뒤늦은 발견이다. 조건이 다 갖춰져 있었지만 인지하지 못하던 상황을 비로소 알게 되는 일, 묻는 순간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질문, 혹은 답을 알았기에 비로소 정확하게 말할 수 있게 된 물음 같은.
10p. <수요곡선의 수호자> - 두 번째 독서
유희는 이 특별한 감각을 되도록 길게 이어가기로 마음억었다. 유희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깨달음의 순간은 일상에 금방 침식되고 휘발된다는 사실을. 그러므로 우선 일상을 차단해야 했다. 세상이 자신에게 부여한 직업이라는 역할에 너무 깊이 몰입하지 않도록 한 발 물러서야 했다. 어쩌면 규칙적으로 먹고 자는 것조차 잠시 뒤로 미뤄야 할지 모른다. 수행자들이 고행과 금식을 하게 되는 이유가 그것이 아닐까. 단 며칠이라도.
18p. <수요곡선의 수호자> - 두 번째 독서
나는 파괴도 생산도 못해. 무질서 정도나 만들어낼 수 있지만 그건 온 우주가 다 하는 일이니까 생색낼 건 아니지.
69p. <차카타파의 열망으로>
나는 서한지의 목소리를 더올렸다. 입안에 머금은 듯 부드럽고 우아하게 울리는 소리. 서한지에게서 나오는 모든 말은 조금도 박으로 벋어나오지 않았다. 바로 압에 서 있던 나에게조자 다지 안던, 부드럽고 고운 날숨에 가볍게 실린 소리.
70p. <차카타파의 열망으로>
나는 옛날 영상은 거의 보지 않는 변이었다. 옛날 사람들의 두박안 모습을 보고 있기가 불변했기 대문이다. 화질 문제가 아니었다. 화면에 담긴 사람들이 문제였다. 2020년 사람들의 발성은 너무 이상했다. 곡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어전지 오래 듣고 있기가 거북앴다.
71p. <차카타파의 열망으로>
그야말로 격음의 시대였다. 만나면 악수로 인사를 하고 한 그릇에 담긴 음식을 나눠 먹기도 하던 시절이었다.
73p. <차카타파의 열망으로>
나는 2020년이, 그 유명한 대감염병의 시대가 근대사의 변곡점으로 다뤄지는 것부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73p. <차카타파의 열망으로>
근대인들에게 2020년은 혐오를 재발견하는 시기였다. 혐오가 죄조로 발명된 게 아니고, 잠재해 있던 혐오를 하나하나 그집어내기 시작한 시대라는 듯이다. 감염병이 전세계에 버지자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증오하기 시작앴다. 원래도 싫어했지만 이제 더는 숨기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 시기의 혐오에 관해서는 남아 있는 자료가 엄정나게 많았다. 말도 안 되게 많았다. 슬모없는 21세기인들 갇으니.
73p. <차카타파의 열망으로>
2020년이 2019년과 달라지기 시작안 것은, 2019년 사람들이 모두 병으로 죽어버려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2020년 사람들이 2019년의 삶을 불결하다고 느기기 시작안 게 결정적이었다. 2021년 사람들은 2020년의 생활양식마저 비위생적이라고 느겼고, 2022년 사람들은 그 2021년에 대해서도 우월감을 갖게 되었다. 격리 실습실이 시간을 격리하듯, 한 시대는 바로 압 시대와 거리를 두었다. 매우 잛은 시간 간격을 두고.
82p. <차카타파의 열망으로>
그의 말에는 21세기식 진심이 담겨 있었다. 만약 서한지가 한 말이 "달줄할래요?"였다면 나는 그의 손을 잡지 않았을 것이다. 절대로. 하지만 그가 나에게 "탈출"을 권했기에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손을 잡고 말았다.
서한지에게서 날아온 침이 얼굴에 닿았다. 비명을 질러야 했지만 어이없게도 나는 가다르시스를 느겼다. 그 순간 나는 개달았다. "가다르시스를 느겼다"는 말은 반드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고 발화해야 한다는 사실을. 침이 잔뜩 튀도록.
83p. <차카타파의 열망으로>
나는 오염되었고 실습은 실배했다. 그러나 그 오염 덕분에 나는 비로소 2020년을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2020년이 내민 손을 덥석 잡았다. 이해한다고 해서 좋아하게 될 것 갇지는 안지만, 적어도 그게 뭔지는 알 것 갇았다. 말하자면 그것은 차카타파의 진심 갇은 것이었다.
85p. <차카타파의 열망으로 - 작가 노트>
그 무렵 사람들의 머릿속을 지배한 화두는 "새로운 일상"이었다. 코로나19가 우리 삶의 어떤 부분을 영원히 바꾸어버리리라는 무시무시한 예측이었다. 내가 상상한 건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도구에 영구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일이었는데, 소설가에게 그 도구란 다름 아닌 '말'이다. 지구의 대기 조성이 변해서 특정 음역을 영원히 사용할 수 없게 된 세계의 음악가와 그의 일상을 떠올려보면 이해가 빠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미래 예측과는 별 상관이 없고, 그보다는 언어와 삶과 세계의 변화에 관한 이야기에 가깝다.
94p. <미래과거시제>
형광등 조명은 어둡지 않았지만, 오히려 형광등이 만들어낸 인위적인 창백함에 그림자가 바짝 오그라든 느낌이었다.
96p. <미래과거시제>
주변 구역과 달리 리모델링이 전혀 되지 않은 채 원형 그대로 보존된 공간의 어색함. 시간의 흐름에서 살짝 비켜난 곳. 유행에 따라 변해간 통로와 통로 사이에 유물처럼 남아 있는 최초의 디자인. 그리고 그 안에 보존되어 있던 오래된 적막.
106p. <미래과거시제>
"그러니까, 시간이 흘러가는 방향에 대한 이야기지? 모든 시간이 한 방향으로 단조롭게 흐르지만은 않았다는 거."
108p. <미래과거시제>
비결은 단순했다. 시선을 의식하느냐 마느냐였다. 빛이 거의 닿지 않는 심해에 사는 물고기들은 어떻게 보이는지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점점 기괴한 모습으로 진화해간다고 했다. 하지만 빛이 잘 드는 곳에 사는 물고기들은 그렇지 않다. 결국 겉모습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108p. <미래과거시제>
강은신은 투명하고 얕은 물에서 진화한 물고기처럼, 오랜 시간 많은 사람의 시선에 노출된 결과라고밖에 볼 수 없는 완전무결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한마디로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이를테면 보는 쪽이 아니라 보이는 쪽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의 몸가짐 같은, 치열하고 불편한 아름다움이 몸 전체에 골고루 배어 있는 느낌이었다.
112p. <미래과거시제>
은경은 익숙한 이름에 주의를 뺏기지 않고 15년 전으로 곧장 페이지를 넘겼다. 몇 달씩 혹은 1년씩 시간이 빠르게 뒤로 흐르면서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가 금세 사라졌다. 은경은 곧 역행하는 시간의 눈금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지만 페이지 넘기기를 멈추지는 않았다.
116p. <미래과거시제>
은경은 그 대화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다. 미래에 일어날 일을 과거에 직접 겪은 일처럼 말하기. 그리고 은경이 기억해서는 안 되는, 하지만 분명히 기억하고 있는 무언가.
117p. <미래과거시제>
확정적으로 일어난 미래의 일. 암과 엄으로 기록되는 사건.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만난 날이 언젠가 한 번 더 돌아온다는 사실.
119p. <미래과거시제>
어쩌면 시간은 생각보다 집요한 극본이 아니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우연인지 필연인지를 구별하는 일 따위가 시간 앞에서 과연 무슨 가치를 지닐 수 있을까.
팽팽하고 질긴 시간의 힘줄이 느껴졌다. 시간을 이해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목격 정도는 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았다.
121p. <미래과거시제>
때로는 주어이고 때로는 목적어여서 그 사이에 들어갈 술어를 잘 골라내기만 하면 몇 번이고 둘이 함께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문장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영혼의 파트너.
124p. <미래과거시제 - 작가 노트>
내가 아는 SF는 생각보다 자주 언어에 관한 이야기가 되고 만다. 아마도 우리가 세계를 만나는 건 오로지 언어를 통해서여서 그런 게 아닐까?
128p. <접히는 신들>
공간이 사라지면 욕망도 사라진다. 모서리 하나조차 비어 있지 않으면 상상이 끼어들 여지도 남지 않게 된다.
130p. <접히는 신들>
문제는 우주선 안에서 열흘을 보내고 나면 지구나 화성 기준으로 하루가 완전히 증발해버린다는 점이었다. 허송세월도 그런 허송세월이 없었다. 좁아터진 객실에서 5개월을 보내는 것도 억울한데 거기에다 열흘에 하루씩을 세금처럼 더 까먹다니.
136p. <접히는 신들>
납작하고 평범한 아이로 돌아와 있었지만, 김은경에게는 접혔던 천재의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었다.
140p. <접히는 신들>
거대한 선체를 빙글빙글 돌려서 인공적으로 중력 비슷한 것을 만들어내는 우주선 안에서는 방향감각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위아래라는 개념부터가 벌써 가상에 불과했으니까. 일단 그렇게 좌표계가 망가져버리고 나면 그리 넓지도 않은 우주선 공간이 무한히 펼쳐진 미로가 되어버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공간을 희한하게 접어놨지?"
147p. <접히는 신들>
요새 인류의 상상력은 다 그쪽에 가 있거든. 요즘 지구 좀 심심한 것 같지 않아? 수십 년 전에 하던 거 계속하고 있는 것 같고. 이상한 인간들이 다 목성 쪽에 정신이 팔려 있어서 그래. 반은 농담이지만. 하여간 물건의 용도 자체가 새로 만들어지고 있어서, 이기론으로 치자면 이 자체를 발명하는 인간들이 수두룩하고, 플라톤식으로 말하자면 형상 자체가 새로 창조되고 있다고 해야겠지.
154p. <접히는 신들>
내가 기억하는 은경은 깜짝 놀랄 만한 기적을 아무렇지도 않게 손안에서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그 기적을 혼자서만 몰래 간직할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진짜로 무서운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158p. <접히는 신들>
나는 존경스러운 눈으로 은경을 바라보았다. 그러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인류 전체를 통틀어 가장 멀리까지 가 있는 사람. 그런 사람과 마주 앉아 함께 차를 마시고 있다니. 나에게도 그런 분야가 평생 단 하나라도 생길 수 있을까. 그럴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조금은 서글퍼졌다.
161p. <접히는 신들>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돼 있는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준비가 돼 있는 사람이라는 게 있기는 한 걸까. 쓸데없이 준비만 오래 해온 사람들이야 수두룩하겠지만, 과연 그 사람들이라고 해서 정말로 그런 순간이 눈앞에 닥쳤을 때 거리낌 없이 온 마음 열 수 있을까.
164~165p. <접히는 신들 - 작가 노트>
공간이 부족하면 욕망도 사라진다는 건 이때 깨달았다. 누가 선물을 사준대도 3차원으로 된 물건은 하나도 갖고 싶지 않았다. 우주에서 제일 흔한 게 공간인데 나한테는 늘 그게 부족했다. 내가 제일 받고 싶은 선물은 어쩌면 공간일지도 모른다.
165p. <접히는 신들 - 작가 노트>
SF에서는 이 '뭔지 모르게 놀랍고 신비하고 환상적인 느낌'을 '경이감'이라고 부른다.
잡지에 실린 이 소설을 읽고, 그 단어만 빼놓고 열정적으로 감상을 이야기하던 독자가 떠올라서 여기에도 써둔다. 경이감이라고 말하면 편하기는 하겠지만, 아무래도 나는 그 긴 감상이 더 좋았다. 그건 정말 '내가 저렇게 신나는 걸 만들고 있구나' 싶을 만큼 멋진 감상이었다.
273p. <홈, 어웨이>
소설이 안 써져서 걱정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나만 포기하면 내가 소설을 썼다는 사실을 기억해줄 사람도 남아 있지 않은 듯했다. 그래서 나는 절박해졌다.
273p. <홈, 어웨이>
나는 방향을 잃고 어딘가를 맴돌았다. 구심점조차 없는 허탈한 방황이었다.
277~278p. <홈, 어웨이>
서소희는 어벙하지만 투미하지는 않은 친구였다. 둘 다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고 마음속으로만 담고 있어야 하는 말이었는데, 뭐가 더 안 좋은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쁜 뜻으로 새긴 말은 아니었다. 야무지지 못할 때가 자주 있기는 해도, 그리고 그런 순간이 종종 지면이나 화면에 담기기는 해도, 그 순간조차 서소희는 반짝반짝 빛났다.
284p. <홈, 어웨이>
다만 혜성처럼 뜸하게 돌아오는 서소희의 다음 작품에는 어쩐지 서슬 퍼런 독기가 스며 있었다. 혜성의 꼬리에 청산가리의 원료인 시안이 포함되어 있듯.
273p. <홈, 어웨이 - 작가 노트>
소설은 별과 같아서, 지금 독자의 손에 들려 있는 이야기는 이미 몇 년 전에 작가의 책상을 떠난 것들이다.
273p. <홈, 어웨이 - 작가 노트>
소설집에 실린 단편소설들은 별자리처럼 한데 모여 있는 것 같지만 실은 하나하나가 다 다른 시간에 최초의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273p. <홈, 어웨이 - 작가 노트>
그래도 작가는 홈 경기장에서 환호를 받으며 글을 쓰는 장면을 자주 상상한다. 우리는 그렇게밖에는 만날 수 없지만, 밤하늘의 별과 우리도 그렇게밖에는 못 만난다. 그러다 어디선가 늦은 추임새라도 들려온다면, 작가는 이야기가 건너간 시공간의 범위를 가늠하고 마치 은하를 가진 것처럼 가슴 설렐 것이다.
292p. <절반의 존재>
사이가 가까워지면 묻지 않아도 언젠가는 답을 해야 하는 질문이라는 게 생기잖아요.
292p. <절반의 존재>
존재의 본질이 어디에 깃들어 있나 하는 문제였죠. 상반신일까요, 하반신일까요? 안세미 씨가 오열할 때 그분 눈이 향한 곳은 제 다리였어요. 인간 지하임의 남아 있는 절반이요. 그러면서도 하반신에 인간 존재의 본질이 담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셨죠.
305p. <알람이 울리면> - 두 번째 독서
우리는 자주 불안해 했지만 불온해질 만큼 깊이 파고들지는 않았다. 그게 무엇이든.
305p. <알람이 울리면> - 두 번째 독서
유리로 된 건물 외벽에 석양이 반사됐다. 시선 닿는 곳마다 어디는 저녁이고 어디는 낮이었다. 어떤 눈송이는 오후로 떨어지고 어떤 눈송이는 밤으로 들어섰다.
308p. <알람이 울리면> - 두 번째 독서
오른발잡이가 일찍 득세한 세상의 규칙이다.
310p. <알람이 울리면> - 두 번째 독서
이게 최소 10년 이상의 시간 동안 적용될 서비스라는 것도 고려해야죠. 그 시간이면 갇혀 있는 의식 쪽에서도 질문을 갖게 된다고요. 아무리 효과적으로 주의를 분산시켜도 10년이면 결국 의식 어딘가에 질문이 축적될 수밖에 없어요. 계속 쌓이다보면 다음 단계의 질문으로 넘어가게 되고요. 이런 식으로 질문이 날카로워져버리면 그 안전하고 일관성 있는 세계에도 균열이 생기지 않겠어요?
312p. <알람이 울리면> - 두 번째 독서
여름에 승진한 이후 아내에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 무언가 암시하는 말투를 즐겨 사용하게 됐다는 점이다. 어쩐지 의미심장한 표정이었지만, 나는 아내의 새 말투가 사실은 허기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315p. <알람이 울리면> - 두 번째 독서
계단을 내려가자 전에는 못 들어본 현악기 소리가 같이 들려왔다. 뭔지는 몰라도 바이올린보다는 훨씬 묵직한 소리였다. 그 소리가 피아노 소리를 떠받쳤다. 잘 모르는 사람이 듣기에도 빼어난 연주였다. 나는 계단참에 멈춰 섰다. 그리고 난간에 기댔다. 운이 좋았다. 왠지 그 소리는 그 계단참에서 제일 멋지게 들릴 것 같았다.
315p. <알람이 울리면> - 두 번째 독서
프로 연주자가 내는 게 틀림없는 자신감 넘치는 현악기 소리 위에 늘 듣던 피아노 소리가 올라탔다. 피아노는 늘 듣던 대로 투박했지만 둘이 만들어내는 소리는 나쁘지 않았다. 연주로는 엉망이었어도 소리가 만들어내는 풍경은 꽤 근사했다. 미숙함은 잘못이 아니었다. 탁월함이야 집 앞 계단에 갖다놔도 변함없이 선(善)이었지만.
320p. <알람이 울리면> - 두 번째 독서
아는 사람의 얼굴이란 참 신기한 조형물이다. 멀리 있어도 남들보다 잘 알아볼 수 있고, 가까이에서 보면 찰나의 순간에 깜짝 놀랄 만큼 많은 정보를 끄집어낼 수 있다.
<미래과거시제>에서 얻어 꼭 써보고픈 표현과 단어
* 돈오 : 갑자기 깨달음.
* 에잔 : 이슬람 사원에서 행하는 찬양 기도.
* 투미하다 : 어리석고 둔하다.
* 양태 : 사물이 존재하는 모양이나 형편.
* 긋닛 : '단속'의 옛말로 순우리말. 도서전의 주제였다는 '긋닛 Punctuation'은 멈춤과 이어짐, 마침표와 쉼표를 뜻하는 말이라고 하던데. 단속의 의미와 문장 부호의 의미를 생각하다 보니 강렬하게 인상에 남을 것 같다.
9p. <수요곡선의 수호자> - 두 번째 독서
유희는 문득 희열을 느꼈다.
9-10p. <수요곡선의 수호자> - 두 번째 독서
영감은 오랫동안 고민해온 물음에 대한 직관의 답이다. 퍼즐이 맞춰지는 순간인 셈이다.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처럼 영감은 늘 뒤늦은 발견이다. 조건이 다 갖춰져 있었지만 인지하지 못하던 상황을 비로소 알게 되는 일, 묻는 순간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질문, 혹은 답을 알았기에 비로소 정확하게 말할 수 있게 된 물음 같은.
10p. <수요곡선의 수호자> - 두 번째 독서
유희는 이 특별한 감각을 되도록 길게 이어가기로 마음억었다. 유희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깨달음의 순간은 일상에 금방 침식되고 휘발된다는 사실을. 그러므로 우선 일상을 차단해야 했다. 세상이 자신에게 부여한 직업이라는 역할에 너무 깊이 몰입하지 않도록 한 발 물러서야 했다. 어쩌면 규칙적으로 먹고 자는 것조차 잠시 뒤로 미뤄야 할지 모른다. 수행자들이 고행과 금식을 하게 되는 이유가 그것이 아닐까. 단 며칠이라도.
18p. <수요곡선의 수호자> - 두 번째 독서
나는 파괴도 생산도 못해. 무질서 정도나 만들어낼 수 있지만 그건 온 우주가 다 하는 일이니까 생색낼 건 아니지.
69p. <차카타파의 열망으로>
나는 서한지의 목소리를 더올렸다. 입안에 머금은 듯 부드럽고 우아하게 울리는 소리. 서한지에게서 나오는 모든 말은 조금도 박으로 벋어나오지 않았다. 바로 압에 서 있던 나에게조자 다지 안던, 부드럽고 고운 날숨에 가볍게 실린 소리.
70p. <차카타파의 열망으로>
나는 옛날 영상은 거의 보지 않는 변이었다. 옛날 사람들의 두박안 모습을 보고 있기가 불변했기 대문이다. 화질 문제가 아니었다. 화면에 담긴 사람들이 문제였다. 2020년 사람들의 발성은 너무 이상했다. 곡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어전지 오래 듣고 있기가 거북앴다.
71p. <차카타파의 열망으로>
그야말로 격음의 시대였다. 만나면 악수로 인사를 하고 한 그릇에 담긴 음식을 나눠 먹기도 하던 시절이었다.
73p. <차카타파의 열망으로>
나는 2020년이, 그 유명한 대감염병의 시대가 근대사의 변곡점으로 다뤄지는 것부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73p. <차카타파의 열망으로>
근대인들에게 2020년은 혐오를 재발견하는 시기였다. 혐오가 죄조로 발명된 게 아니고, 잠재해 있던 혐오를 하나하나 그집어내기 시작한 시대라는 듯이다. 감염병이 전세계에 버지자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증오하기 시작앴다. 원래도 싫어했지만 이제 더는 숨기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 시기의 혐오에 관해서는 남아 있는 자료가 엄정나게 많았다. 말도 안 되게 많았다. 슬모없는 21세기인들 갇으니.
73p. <차카타파의 열망으로>
2020년이 2019년과 달라지기 시작안 것은, 2019년 사람들이 모두 병으로 죽어버려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2020년 사람들이 2019년의 삶을 불결하다고 느기기 시작안 게 결정적이었다. 2021년 사람들은 2020년의 생활양식마저 비위생적이라고 느겼고, 2022년 사람들은 그 2021년에 대해서도 우월감을 갖게 되었다. 격리 실습실이 시간을 격리하듯, 한 시대는 바로 압 시대와 거리를 두었다. 매우 잛은 시간 간격을 두고.
82p. <차카타파의 열망으로>
그의 말에는 21세기식 진심이 담겨 있었다. 만약 서한지가 한 말이 "달줄할래요?"였다면 나는 그의 손을 잡지 않았을 것이다. 절대로. 하지만 그가 나에게 "탈출"을 권했기에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손을 잡고 말았다.
서한지에게서 날아온 침이 얼굴에 닿았다. 비명을 질러야 했지만 어이없게도 나는 가다르시스를 느겼다. 그 순간 나는 개달았다. "가다르시스를 느겼다"는 말은 반드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고 발화해야 한다는 사실을. 침이 잔뜩 튀도록.
83p. <차카타파의 열망으로>
나는 오염되었고 실습은 실배했다. 그러나 그 오염 덕분에 나는 비로소 2020년을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2020년이 내민 손을 덥석 잡았다. 이해한다고 해서 좋아하게 될 것 갇지는 안지만, 적어도 그게 뭔지는 알 것 갇았다. 말하자면 그것은 차카타파의 진심 갇은 것이었다.
85p. <차카타파의 열망으로 - 작가 노트>
그 무렵 사람들의 머릿속을 지배한 화두는 "새로운 일상"이었다. 코로나19가 우리 삶의 어떤 부분을 영원히 바꾸어버리리라는 무시무시한 예측이었다. 내가 상상한 건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도구에 영구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일이었는데, 소설가에게 그 도구란 다름 아닌 '말'이다. 지구의 대기 조성이 변해서 특정 음역을 영원히 사용할 수 없게 된 세계의 음악가와 그의 일상을 떠올려보면 이해가 빠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미래 예측과는 별 상관이 없고, 그보다는 언어와 삶과 세계의 변화에 관한 이야기에 가깝다.
94p. <미래과거시제>
형광등 조명은 어둡지 않았지만, 오히려 형광등이 만들어낸 인위적인 창백함에 그림자가 바짝 오그라든 느낌이었다.
96p. <미래과거시제>
주변 구역과 달리 리모델링이 전혀 되지 않은 채 원형 그대로 보존된 공간의 어색함. 시간의 흐름에서 살짝 비켜난 곳. 유행에 따라 변해간 통로와 통로 사이에 유물처럼 남아 있는 최초의 디자인. 그리고 그 안에 보존되어 있던 오래된 적막.
106p. <미래과거시제>
"그러니까, 시간이 흘러가는 방향에 대한 이야기지? 모든 시간이 한 방향으로 단조롭게 흐르지만은 않았다는 거."
108p. <미래과거시제>
비결은 단순했다. 시선을 의식하느냐 마느냐였다. 빛이 거의 닿지 않는 심해에 사는 물고기들은 어떻게 보이는지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점점 기괴한 모습으로 진화해간다고 했다. 하지만 빛이 잘 드는 곳에 사는 물고기들은 그렇지 않다. 결국 겉모습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108p. <미래과거시제>
강은신은 투명하고 얕은 물에서 진화한 물고기처럼, 오랜 시간 많은 사람의 시선에 노출된 결과라고밖에 볼 수 없는 완전무결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한마디로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이를테면 보는 쪽이 아니라 보이는 쪽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의 몸가짐 같은, 치열하고 불편한 아름다움이 몸 전체에 골고루 배어 있는 느낌이었다.
112p. <미래과거시제>
은경은 익숙한 이름에 주의를 뺏기지 않고 15년 전으로 곧장 페이지를 넘겼다. 몇 달씩 혹은 1년씩 시간이 빠르게 뒤로 흐르면서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가 금세 사라졌다. 은경은 곧 역행하는 시간의 눈금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지만 페이지 넘기기를 멈추지는 않았다.
116p. <미래과거시제>
은경은 그 대화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다. 미래에 일어날 일을 과거에 직접 겪은 일처럼 말하기. 그리고 은경이 기억해서는 안 되는, 하지만 분명히 기억하고 있는 무언가.
117p. <미래과거시제>
확정적으로 일어난 미래의 일. 암과 엄으로 기록되는 사건.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만난 날이 언젠가 한 번 더 돌아온다는 사실.
119p. <미래과거시제>
어쩌면 시간은 생각보다 집요한 극본이 아니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우연인지 필연인지를 구별하는 일 따위가 시간 앞에서 과연 무슨 가치를 지닐 수 있을까.
팽팽하고 질긴 시간의 힘줄이 느껴졌다. 시간을 이해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목격 정도는 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았다.
121p. <미래과거시제>
때로는 주어이고 때로는 목적어여서 그 사이에 들어갈 술어를 잘 골라내기만 하면 몇 번이고 둘이 함께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문장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영혼의 파트너.
124p. <미래과거시제 - 작가 노트>
내가 아는 SF는 생각보다 자주 언어에 관한 이야기가 되고 만다. 아마도 우리가 세계를 만나는 건 오로지 언어를 통해서여서 그런 게 아닐까?
128p. <접히는 신들>
공간이 사라지면 욕망도 사라진다. 모서리 하나조차 비어 있지 않으면 상상이 끼어들 여지도 남지 않게 된다.
130p. <접히는 신들>
문제는 우주선 안에서 열흘을 보내고 나면 지구나 화성 기준으로 하루가 완전히 증발해버린다는 점이었다. 허송세월도 그런 허송세월이 없었다. 좁아터진 객실에서 5개월을 보내는 것도 억울한데 거기에다 열흘에 하루씩을 세금처럼 더 까먹다니.
136p. <접히는 신들>
납작하고 평범한 아이로 돌아와 있었지만, 김은경에게는 접혔던 천재의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었다.
140p. <접히는 신들>
거대한 선체를 빙글빙글 돌려서 인공적으로 중력 비슷한 것을 만들어내는 우주선 안에서는 방향감각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위아래라는 개념부터가 벌써 가상에 불과했으니까. 일단 그렇게 좌표계가 망가져버리고 나면 그리 넓지도 않은 우주선 공간이 무한히 펼쳐진 미로가 되어버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공간을 희한하게 접어놨지?"
147p. <접히는 신들>
요새 인류의 상상력은 다 그쪽에 가 있거든. 요즘 지구 좀 심심한 것 같지 않아? 수십 년 전에 하던 거 계속하고 있는 것 같고. 이상한 인간들이 다 목성 쪽에 정신이 팔려 있어서 그래. 반은 농담이지만. 하여간 물건의 용도 자체가 새로 만들어지고 있어서, 이기론으로 치자면 이 자체를 발명하는 인간들이 수두룩하고, 플라톤식으로 말하자면 형상 자체가 새로 창조되고 있다고 해야겠지.
154p. <접히는 신들>
내가 기억하는 은경은 깜짝 놀랄 만한 기적을 아무렇지도 않게 손안에서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그 기적을 혼자서만 몰래 간직할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진짜로 무서운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158p. <접히는 신들>
나는 존경스러운 눈으로 은경을 바라보았다. 그러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인류 전체를 통틀어 가장 멀리까지 가 있는 사람. 그런 사람과 마주 앉아 함께 차를 마시고 있다니. 나에게도 그런 분야가 평생 단 하나라도 생길 수 있을까. 그럴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조금은 서글퍼졌다.
161p. <접히는 신들>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돼 있는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준비가 돼 있는 사람이라는 게 있기는 한 걸까. 쓸데없이 준비만 오래 해온 사람들이야 수두룩하겠지만, 과연 그 사람들이라고 해서 정말로 그런 순간이 눈앞에 닥쳤을 때 거리낌 없이 온 마음 열 수 있을까.
164~165p. <접히는 신들 - 작가 노트>
공간이 부족하면 욕망도 사라진다는 건 이때 깨달았다. 누가 선물을 사준대도 3차원으로 된 물건은 하나도 갖고 싶지 않았다. 우주에서 제일 흔한 게 공간인데 나한테는 늘 그게 부족했다. 내가 제일 받고 싶은 선물은 어쩌면 공간일지도 모른다.
165p. <접히는 신들 - 작가 노트>
SF에서는 이 '뭔지 모르게 놀랍고 신비하고 환상적인 느낌'을 '경이감'이라고 부른다.
잡지에 실린 이 소설을 읽고, 그 단어만 빼놓고 열정적으로 감상을 이야기하던 독자가 떠올라서 여기에도 써둔다. 경이감이라고 말하면 편하기는 하겠지만, 아무래도 나는 그 긴 감상이 더 좋았다. 그건 정말 '내가 저렇게 신나는 걸 만들고 있구나' 싶을 만큼 멋진 감상이었다.
273p. <홈, 어웨이>
소설이 안 써져서 걱정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나만 포기하면 내가 소설을 썼다는 사실을 기억해줄 사람도 남아 있지 않은 듯했다. 그래서 나는 절박해졌다.
273p. <홈, 어웨이>
나는 방향을 잃고 어딘가를 맴돌았다. 구심점조차 없는 허탈한 방황이었다.
277~278p. <홈, 어웨이>
서소희는 어벙하지만 투미하지는 않은 친구였다. 둘 다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고 마음속으로만 담고 있어야 하는 말이었는데, 뭐가 더 안 좋은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쁜 뜻으로 새긴 말은 아니었다. 야무지지 못할 때가 자주 있기는 해도, 그리고 그런 순간이 종종 지면이나 화면에 담기기는 해도, 그 순간조차 서소희는 반짝반짝 빛났다.
284p. <홈, 어웨이>
다만 혜성처럼 뜸하게 돌아오는 서소희의 다음 작품에는 어쩐지 서슬 퍼런 독기가 스며 있었다. 혜성의 꼬리에 청산가리의 원료인 시안이 포함되어 있듯.
273p. <홈, 어웨이 - 작가 노트>
소설은 별과 같아서, 지금 독자의 손에 들려 있는 이야기는 이미 몇 년 전에 작가의 책상을 떠난 것들이다.
273p. <홈, 어웨이 - 작가 노트>
소설집에 실린 단편소설들은 별자리처럼 한데 모여 있는 것 같지만 실은 하나하나가 다 다른 시간에 최초의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273p. <홈, 어웨이 - 작가 노트>
그래도 작가는 홈 경기장에서 환호를 받으며 글을 쓰는 장면을 자주 상상한다. 우리는 그렇게밖에는 만날 수 없지만, 밤하늘의 별과 우리도 그렇게밖에는 못 만난다. 그러다 어디선가 늦은 추임새라도 들려온다면, 작가는 이야기가 건너간 시공간의 범위를 가늠하고 마치 은하를 가진 것처럼 가슴 설렐 것이다.
292p. <절반의 존재>
사이가 가까워지면 묻지 않아도 언젠가는 답을 해야 하는 질문이라는 게 생기잖아요.
292p. <절반의 존재>
존재의 본질이 어디에 깃들어 있나 하는 문제였죠. 상반신일까요, 하반신일까요? 안세미 씨가 오열할 때 그분 눈이 향한 곳은 제 다리였어요. 인간 지하임의 남아 있는 절반이요. 그러면서도 하반신에 인간 존재의 본질이 담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셨죠.
305p. <알람이 울리면> - 두 번째 독서
우리는 자주 불안해 했지만 불온해질 만큼 깊이 파고들지는 않았다. 그게 무엇이든.
305p. <알람이 울리면> - 두 번째 독서
유리로 된 건물 외벽에 석양이 반사됐다. 시선 닿는 곳마다 어디는 저녁이고 어디는 낮이었다. 어떤 눈송이는 오후로 떨어지고 어떤 눈송이는 밤으로 들어섰다.
308p. <알람이 울리면> - 두 번째 독서
오른발잡이가 일찍 득세한 세상의 규칙이다.
310p. <알람이 울리면> - 두 번째 독서
이게 최소 10년 이상의 시간 동안 적용될 서비스라는 것도 고려해야죠. 그 시간이면 갇혀 있는 의식 쪽에서도 질문을 갖게 된다고요. 아무리 효과적으로 주의를 분산시켜도 10년이면 결국 의식 어딘가에 질문이 축적될 수밖에 없어요. 계속 쌓이다보면 다음 단계의 질문으로 넘어가게 되고요. 이런 식으로 질문이 날카로워져버리면 그 안전하고 일관성 있는 세계에도 균열이 생기지 않겠어요?
312p. <알람이 울리면> - 두 번째 독서
여름에 승진한 이후 아내에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 무언가 암시하는 말투를 즐겨 사용하게 됐다는 점이다. 어쩐지 의미심장한 표정이었지만, 나는 아내의 새 말투가 사실은 허기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315p. <알람이 울리면> - 두 번째 독서
계단을 내려가자 전에는 못 들어본 현악기 소리가 같이 들려왔다. 뭔지는 몰라도 바이올린보다는 훨씬 묵직한 소리였다. 그 소리가 피아노 소리를 떠받쳤다. 잘 모르는 사람이 듣기에도 빼어난 연주였다. 나는 계단참에 멈춰 섰다. 그리고 난간에 기댔다. 운이 좋았다. 왠지 그 소리는 그 계단참에서 제일 멋지게 들릴 것 같았다.
315p. <알람이 울리면> - 두 번째 독서
프로 연주자가 내는 게 틀림없는 자신감 넘치는 현악기 소리 위에 늘 듣던 피아노 소리가 올라탔다. 피아노는 늘 듣던 대로 투박했지만 둘이 만들어내는 소리는 나쁘지 않았다. 연주로는 엉망이었어도 소리가 만들어내는 풍경은 꽤 근사했다. 미숙함은 잘못이 아니었다. 탁월함이야 집 앞 계단에 갖다놔도 변함없이 선(善)이었지만.
320p. <알람이 울리면> - 두 번째 독서
아는 사람의 얼굴이란 참 신기한 조형물이다. 멀리 있어도 남들보다 잘 알아볼 수 있고, 가까이에서 보면 찰나의 순간에 깜짝 놀랄 만큼 많은 정보를 끄집어낼 수 있다.
<미래과거시제>에서 얻어 꼭 써보고픈 표현과 단어
* 돈오 : 갑자기 깨달음.
* 에잔 : 이슬람 사원에서 행하는 찬양 기도.
* 투미하다 : 어리석고 둔하다.
* 양태 : 사물이 존재하는 모양이나 형편.
* 긋닛 : '단속'의 옛말로 순우리말. 도서전의 주제였다는 '긋닛 Punctuation'은 멈춤과 이어짐, 마침표와 쉼표를 뜻하는 말이라고 하던데. 단속의 의미와 문장 부호의 의미를 생각하다 보니 강렬하게 인상에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