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심채경>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中, 천문학자가 된 평행세계의 모순을 상상하며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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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p.

오랜 친구가 흔히 그렇듯 서로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르고 지내다 문득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친구는 미술을 전공하는 유학생이 되어 있었다. 졸업하고도 계속 그림을 그릴 거라고 했다. 화가가 되면 뭐해서 먹고사느냐고 물었더니, 이래서 공대생은 안 된다고 했다. 나는 공대가 아니고 자연대라고 선을 그었다. 그럼 자연대 나온 천문학자는 돈을 많이 버느냐고 했다. 눈물 나는 노력 끝에 입학했다는 그 미술대학의 명성을 전혀 몰라 미안했던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사실 속으로는 조금 놀란 채였다. 뭐해서 먹고사느냐는, 걱정인 듯 걱정 아닌 그 질문을 내가 하다니. 나는 언제나 그 질문을 받는 쪽이다.


13p.

그런 사람들이 좋았다. 남들이 보기엔 저게 대체 뭘까 싶은 것에 즐겁게 몰두하는 사람들.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정치적 싸움을 만들어내지도 않을, 대단한 명예나 부가 따라오는 것도 아니요, 텔레비전이나 휴대전화처럼 보편적인 삶의 방식을 바꿔놓을 영향력을 지닌 것도 아닌 그런 일에 열정을 바치는 사람들. 신호가 도달하는 데만 수백 년 걸릴 곳에 하염없이 전파를 흘려보내며 온 우주에 과연 '우리뿐인가'를 깊게 생각하는 무해한 사람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동경한다. 그리고 그들이 동경하는 하늘을, 자연을, 우주를 함께 동경한다.


14p.

헤어질 무렵, 친구는 내가 천문학자가 되어서 좋다고 했다. 나는 그 친구가 무엇이어도 좋았지만, 열정적이고 무해하고 아름다운 화가라는 점이 특별히 마음에 들었다. 숨막히게 아름다웠던 잡지 속 우주로부터 한 사람은 아름다움을 향해, 한 사람은 우주를 향해 날아가고 있다.


22p.

조금 전까지 137번쯤 해봤던 것을 138번째 다시 해보는 따위의 일은 내 적성에 잘 맞았다.


23p.

국내 천문학계는 대단히 좁은데, 천문학의 범위는 천문학적으로 넓어서 관심을 줄 대상이 너무 많다. 그리고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는 것은 외롭지만 아주 흥미로운 일이다.


27p.

그날 응시자의 대다수를 차지한 중년 남성들은 여러가지 이유로 면허가 취소되어 다시 따러 온 사람들이었다. (...) 하지만 같은 교시에 시험을 본 사람 중에 합격자는 나와 이십대 초반의 청년, 둘 뿐이었다. 기능시험 코스를 집중적으로 연습하고 시험용 운전 공식을 달달 외워 온, 도로에는 아직 한 번도 나가보지 않은 사람들만 합격한 셈이다.


27~28p.

운전면허가 있다고 운전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 갓 면허를 딴 사람이나 면허를 따기만 하고 오래 묵혀둔 '장롱면허' 보유자들은 운전을 허가받은 부류에 속하지만, 운전은 영 서툴다. 그런 의미에서 박사학위는 일종의 운전면허 같은 것이다.


28p.

아직 박사 수료생이던 시절, 박사가 아니어도 대학 강의를 할 수는 있었지만 행정 담당자가 시간강사인 나를 습관적으로 '박사님'이라고 부를 때 '아니, 사실은 박사 수료니까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해야 하나?' 하는 잡생각을 했다.


54~55p.

나는 대학을 사랑한다. (...) 동시에 나는 대학을 싫어한다. 오늘날 대학이 수행하고 있는 기능이란 어리둥절한 채 성인이 되어버렸으나 실상은 유예된 청소년에 지나지 않는 이들의 귀중한 스무 살 생명표를 꼭 쥐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같은 해 태어난 국민 중 팔 할 이상이 대학에 진학하는 사회. 학생들은 대학에 학문을 배우러 오지 않는다. 초등학교 다음 중학교에 갔고, 중학교 다음 고등학교에 간 것과 같이 고등학교를 마쳤으니 대학에 진학할 뿐이다.


55p.

그들의 젊음은 싸구려 술과 술값보다 비싼 커피와 크고 작은 성추행과 미필자조차 향유하는 선배들의 군대식 갑질, 전공과목 들을 시간을 뺏는 교양 강의와 대학생다운 교양을 쌓을 틈을 주지 않는 전공 강의, 토익 시험과 한국사 시험과 각종 컴퓨터 자격증과 크고 작은 기업의 공모전과 인턴 경력에 소모된다. 과제로 수많은 보고서를 작성하지만 제대로 된 글쓰기를 연습할 기회는 별로 없다. 대신 비문으로 A4 용지 다섯 장을 채워내는 끈기, 남의 것을 베끼되 표절 여부를 자동으로 검사하는 프로그램에 걸리지 않게 몇몇 표현을 바꿔치기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85p.

책 속에는 우주에 대한 찬탄의 정서가 끊이지 않는 배경음악처럼 책의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계속 흐른다. 우주에 대한 칼 세이건의 경외와 찬탄이 담긴 문장들을 읽노라면 그의 혼이 돌아와 내게 말하는 것 같다. "오, 여러분, 우주는 정말 거대하고 광활한 곳이죠. 진실로 멋지지 않나요? 참으로 대단하지 않나요? 과연 감동적이지 않나요? 오, 여러분, 이 우주를 봐요, 온통 우주예요!" 그는 계속해서 경탄한다. 독자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일 때까지.


85p.

나는 좋아하는 록 밴드의 새 음반이 나올 때마다 언니에게 강제로 들려주며 "좋지? 좋지?"를 연발하곤 했다. 그러면 음악 취향이 나와 사뭇 다른 언니는 마지못해 몇 초 듣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좋네" 짧게 한마디하며 수긍해주곤 했다. 하지만 내가 그런 몰상식한 짓을 몇 년이나 반복하자 어느 날은 인제 그만 좀 하라면서 버럭 화를 냈다. 아차, 내 감동은 오롯이 나만의 것이었지.


110p.

'사회적'인 나이가 든다는 것은, 다양한 것을 보고 듣고 접하면서 감정의 어떤 주파수는 진폭이 줄어들고 어떤 주파수는 증폭되는 구조를 갖게 되는 게 아닐까?


116p.

그래서 감정의 진폭이 큰 쪽이 우월한 것이냐 하면 그렇지 않다. 어느 쪽이 더 의미가 깊고 가치가 높은 삶이냐 하면 그것도 쉽게 말하기 어렵다. 아이를 키우면서 얻는 행복이 천국 같다던데 하고 묻는 친구에게 나는 천상의 기쁨과 동시에 그만큼 깊은 지옥도 만나게 된다고 답해주었다. 결국은 다 상쇄되지 않을까.


137p.

달에 별똥별이 떨어질 때 크레이터가 하나씩 생겨난다. 다시 말하자면, 어떤 하나의 크레이터 안에 있는 흙은 생성 연대와 기원이 같다.


154p.

어릴 땐 숙제하다 잘 모르면 부모님께 물어볼 수 있었지만, 이제는 요즘의 고민거리가 무엇인지 설명하기조차 어렵다. 부모님은 각자 나름의 인생에서 대가이시지만, 내가 가는 길은 그 방향이 아니다. 지구를 떠난 탐사선처럼, 내가 나의 삶을 향해 가열차게 나아갈수록 부모님과 공유할 수 있는 것은 줄어든다. 그렇게 점차 멀어져만 가는 것이다.


158p.

책이라는 것은 선물하기가 은근히 까다로운 물건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각자의 독서 취향이 있고, 독서에 취미가 없는 사람은 책 좀 읽으라는 뜻이냐며 발끈하기 때문이다.


183p.

우리가 보는 세상은 우리가 규정한 것이다. 하늘의 달도 우리가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다르게 보이지 않는가.


187p.

초승달이나 보름달은 보는 이가 많지마는 그믐달은 보는 이가 적어 그만큼 외로운 달이다. (...) 어떻든지, 그믐달은 가장 정 있는 사람이 보는 중에, 또는 가장 한 있는 사람이 보아주고, 또 가장 무정한 사람이 보는 동시에 가장 무서운 사람들이 많이 보아준다.


219p.

하긴, 별을 보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원시 인류는 가로등도, 상점 간판의 불빛도, 자동차 헤드라이트도 없는 칠흑 같은 밤하늘을 매일 밤 보았을 테니까. 아니, 별이 쏟아질 듯해서 칠흑 같지 않은, 온통 블링블링한 밤하늘을 보았겠지. 노곤한 하루를 마치고 나면, 그들은 서로의 체온에 의지하며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을까.


221p.

인생에도 '문제은행'이 있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태어난 이래 단 한 번도 삶은 뻔한 적이 없었다.


223p.

동물원은 쓸쓸할 수밖에 없다. 내가 '인류원'에 들어가 있다면 그럴 것처럼. 커트 보니것의 제5도살장에 그런 사람이 나온다. 주인공 빌리는 외계인에게 납치되어 트랄파마도어 행성의 동물원에 갇힌다. 지구의 인간 서식처를 그대로 재현했지만 화장실만은 완전히 노출된 공간에서 알몸으로 전시된 채로 먹고, 싸고, 씻는다. (...) 동물원에 '전시된' 동물을 한껏 가련하게 여기면서도 자꾸만 찾아가서 기꺼이 관람객이 되는 나는 트랄파마도어에서 온 이기적이고 비겁한 사랑꾼이다.


224p.

엎어지고 넘어지고 구르면서도, 자기가 있는 곳이 동물원이라는 것을 모르는 채 부산스럽고도 즐겁게 노느라 정신이 없는 꼬마를 보며, 아기란 저런 것이구나 했다. 매우 귀찮아 하면서도 이따금 제 새끼들을 핥아주는 어미 곰을 보며 부모란 저런 것이구나 했다.


224p.

꼬마는 자기가 있는 곳이 동물원이라는 것을 인지해서 탈출했던 것일까? 대전 오월드에서 탈출했던 퓨마 뽀롱이는 분류상 '맹수'에 속한다는 이유로 발견 직후 사살되었다. 고리롱이 사육장 밖으로 나섰다면 어땠을까. 그는 세상을 한번쯤은 들었다 놨겠지. 내 머릿속은 자유니까, 상상 속에서 그에게 자유를 주어본다.


225p.

다큐멘터리 속 고릴라를 마주할 때면, 고리롱이 고향에 계속 머물렀다면 그의 삶이 어땠을까 상상해본다. 낮에는 그 우람한 몸매와 끝없는 용맹의 위엄을 떨치고, 밤에는 설핏 잠을 깨어 쏟아지는 별을 보았을까. 이따금씩 커다란 유성이 하늘을 가로지르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가락을 들어 별똥별이 지나간 찰나의 길을 따라 허공을 그어보았을까. 나는 그의 말년을 잠시 엿보았을 뿐이지만, 그는 진정 멋지고 상대에게 경외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한 최고의 수컷이었다. 어쩌면 하늘의 별이 되었을, 안녕, 고리롱.


227p.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은빛 물결. '은파'는 그런 뜻이다. 푸른 여름의 밤바다 위로 밝은 보름달이 고요히 떠오르면 연인들은 그 달빛 아래에 앉아 달이 아름답다고 서로에게 속삭이겠지.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달이 아름답네요'로 번역했다는 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일화를 주고받으면서.


230p.

지구는 달보다 네 배나 크다. 다시 말하면 달에서 보는 지구는 우리가 지구에서 보는 달보다 네 배나 큰 것이다. 그렇게 거대한 지구가 떠 있는 하늘을 가질 수 있다니, 숨쉴 공기도 없고 먹을 유기물질도 없는 척박한 그곳으로 당장이라도 날아가고 싶은 심정이 든다. 게다가 달에서 보는 지구는 마치 선반에 올려놓은 오르골 장식품처럼 달 하늘 어딘가에 떠서 제자리에서 천천히 돈다. 낮에도 밤에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지구의 위치는 거의 변하지 않는다. 달에 집을 짓는다면 지구로 향하는 창을 낼 것이다. 창문이 곧 생동하는 액자가 될 테니.


253p.

밤도 흐르는데, 계절도 흐르겠지. 나도 이렇게 매 순간 살아 움직이며, 인생을 따라 한없이 흘러가겠지. 내가 잠시 멈칫하는 사이에도 밤은 흐르고 계절은 지나간다. 견디기 힘든 삶의 파도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뒤에는 물 아래 납작 엎드려 버티고 버텼던 매 몸을 달래며, 적도의 해변에 앉아 커피 한잔 놓고 눈멀도록 바다만 바라보고 싶다. 한낮의 열기가 다 사위고 나면, 여름밤의 돌고래가 내게 말을 걸어올 것이다. 가만히 ㅇ있어도 우리는 아주 빠르게 나아가는 중이라고. 잠시 멈췄대도, 다 괜찮다고.


256~257p.

이봐요, 이 상태로 지구에서 달까지 간다고요? 저 여기서 좀 내릴게요. 그래요, 지금 당장요. 약은 약사에게, 과학은 과학자에게, 그리고 탐험은 탐험가에게 맡깁시다. 저의 지구력은 지구에서만 발휘할 수 있거든요.


265~266p.

연구는 내가 인류의 대리자로서 행하는 것이고, 그 결과를 논문으로 쓰는 것이다. 그러니 논문 속의 '우리'는 논문의 공저자들이 아니라 인류다. 달에 사람을 보낸 것도 미항공우주국의 연구원이나 미국의 납세자가 아니라, '우리' 인류인 것이다. 그토록 공들여 얻은 우주 탐사 자료를 전 인류와 나누는 아름다운 전통은 그래서 당연하다.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에서 얻어 꼭 써보고픈 표현과 단어



* 천착하다 : 어떤 원인이나 내용 따위를 따지고 파고들어 알려고 하거나 연구하다.

* 방증 : 사실을 직접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되지는 않지만, 주변의 상황을 밝힘으로써 간접적으로 증명에 도움을 줌. 또는 그 증거.

* 위시 : 여럿 중에서 어떤 대상을 첫자리 또는 대표로 삼음.

* 전신 : 신분, 단체, 회사 따위의 바뀌기 전의 본체.

* 읍소 :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하소연함.

* 상보 : 서로 모자란 부분을 보충함.

* 번안 : 원작의 내용이나 줄거리는 그대로 두고 풍속, 인명, 지명 따위를 시대나 풍토에 맞게 바꾸어 고침.

* 미봉책 : 눈가림만 하는 일시적인 계책(計策).

* 기작(機作) : 생물의 생리적인 작용을 일으키는 기본 원리.

* 박명 : 해가 뜨기 전이나 해가 진 후 얼마 동안 주위가 희미하게 밝은 상태.

* 수주 : 주문을 받음. 주로 물건을 생산하는 업자가 제품의 주문을 받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 판서 : 칠판에 분필로 글을 씀. 또는 그 글.

* 문고본 : 문고 형식으로 간행한 책. (*문고 : 1 책이나 문서를 넣어 두는 방이나 상자. 2 책을 보관하는 집이나 방. 3 출판물의 한 형식. 대중에게 널리 보급될 수 있도록 값이 싸고 가지고 다니기 편하게 부문별, 내용별 등 일정한 체계를 따라 자그마하게 만든다.)

* 버히다 : ‘베다’의 옛말.

* 고색창연하다 : 오래되어 예스러운 풍치나 모습이 그윽하다.

* 사위다 : 불이 사그라져서 재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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