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p.
눈을 떴는데도 어둠이 시야를 압도한다. 검은 헝겊 같은 걸로 눈이 가려져, 수없이 교직된 날줄과 씨줄 사이로 빛의 티끌이 새어 들어온다.
7p.
입술과 코에 맴도는 공기의 온도나, 뺨에 닿는 촉촉한 풀잎으로 미루어 갓밝이 무렵이다.
7p.
시각이 차단당하여 새소리와 풀 냄새 사이에서 촉각마저 길을 잃는다.
10p.
늘 생각하되, 생각에서 행동까지 시간이 걸리면 안 돼. 생각은 매 순간 해야 하지만, 생각에 빠지면 죽어.
35~36p.
⎯ 생각은 계속해도 좋아. 그런데 생각에 빠지는 건 안 돼.
계속하는데, 계속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는데…… 빠져들지 않을 방법이, 익사하지 않을 도리가 도대체 있기나 한 건지, 모를 일이다.
50p.
기겁했다는 티를 내지 않도록 심상하게 대꾸하나 목소리에서 잔물결에서 잔물결마저 지우지는 못한다.
54p.
⎯ 보이지 않기 때문이에요. 알 수 없으니까요.
⎯ 아플 때보다 무서울 때 우는구나, 너.
드러낸 게 그냥 등이 아니라, 생살이 도려내진 자리에 나타난 근육과 뼈 같아서. 어쩌면 붉은 내장 같아서. 두려움이 흔들고 지나간 마음속에 한 문장의 기도가 남아 있어서.
55p.
산장에 펼쳐진 두 개의 침낭 사이로 스며드는 풀 냄새가 밤에는 한층 더 짙어진다. 건너편 침낭에서 고개만 내밀고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보통 누군가의 살을 베어냈다든지 뼈를 잘라냈다든지, 뼈와 힘줄 사이에 박혀 아무리 칼날을 깊이 쑤셔도 빠져나오지 않았다던 탄환과, 그것을 맞은 사람이 서서히 죽어가던 모습에 대한 것이다. 바람과 나뭇잎의 탄주(彈奏) 사이로 들려오는 그의 말소리는 자장가처럼 그녀의 귓가에 내려앉아, 찢기어 원본의 형태를 잃은 꿈의 갈피 사이로 스며든다.
62p.
그는 다섯 손가락을 펴서 그녀의 하복부를 감싸듯이 가리키곤 말을 이어간다.
⎯ 여기 보존 잘해야 한다는 건 결혼을 하고 애를 낳으라는 게 아니야. 여기 망가져서 뽑아내면 힘을 못 쓴다고. 한동안은 보리차 주전자도 들기 힘들다고. 왠지는 나한테 묻지 말고. 그냥 그렇게 생겼고 그렇게 불공평하게 만들어졌다고. 몸이.
64p.
그녀는 서서 쏘고, 앉아서도 쏘고, 엎드려서도 쏜다. 산 전체에 총성을 새겨 넣고 화약흔을 묻힌다. 그의 손이 어깨와 턱 그리고 옆구리를 건드리며 자세를 바로잡는 것이 신경 쓰이지만 명중률은 나쁘지 않다. 그리고 그녀는 이 손길이, 훗날 설령 그가 없는 동안에라도 자신의 몸속에 잔존하리라는 것을 안다.
67p.
⎯ 그리고 대답은 짧게, 얼버무리지 말고.
그는 알지 못한다. 그녀가 입을 열면, 소리를 내면...... 입 속에서 너울거리는 나비의 날갯짓을 해금해버리면. 그가 알아서는 안 되고 알 필요 없는, 그러나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마음이 불현듯 튀어나올까 두려움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그건 아마 흘러나오거나 새어 나오는 고요하고 점잖은 방식이 아니라, 얼기설기 서툴게 꿰맨 자리가 잡아채어 뜯기면서 비집고 나오는 모습일 것이다. 그 자리엔 주워 담을 수 없는 말이, 찢긴 나비의 날개처럼 흩어져 있을 것이다. 그 파편의 형태를 상상하다가 그녀는 침묵으로 엮은 울타리에 이윽고 날붙이를 댄다.
⎯ 물어볼 게 있는데요.
81p.
그렇게 말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지 않기를, 심장박동이 그에게 전해지지 않기를, 끝까지 그 무엇도 폭로하지 않은 채 수납 후 봉할 상자의 깊이와 넓이가 자기 안에 무한하기를 바라며 그녀는 심드렁하게 말을 돌린다. 도구의 유용성을 칭찬하는 그의 말과 팔에 도취되지 않도록.
89p.
그의 말이 공이가 되어 뇌관을 때리는 바람에 그녀는 끝내 통곡하고 만다. 몸 안에서 이제 막 펼쳐진 깃발이 구조 요청이나 항복 선언처럼 나부낀다.
95p. <작가의 말>
그리고 저는 그녀가 완벽하지 않아서 좋습니다. 건강하지 않은 사고와 유해한 감정을 품을 수 있는 사람이어서 좋습니다. 넘치게 받은 사랑의 이유 가운데 상당 부분이, 그 완전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은 모습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덕분에 결격을 안은 쓰기를 계속할 수 있어서 고맙습니다.
<파쇄>에서 얻어 꼭 써보고픈 표현과 단어
* 강선 : 총포의 내부에 나사 모양으로 판 홈. 탄환이 목표물에 깊이 박히도록 돌면서 나가게 한다.
* 환후(幻嗅) : 실제로 나지 아니하는 냄새를 맡는 환각 현상
* 도저하다 : (1)학식이나 생각, 기술 따위가 아주 깊다. (2)행동이나 몸가짐이 빗나가지 않고 곧아서 훌륭하다.
* 응달 : 볕이 잘 들지 아니하는 그늘진 곳.
* 함소 : (1)웃음을 머금음. (2)꽃이 피기 시작함을 비유적으로 이루는 말.
* 공산 : 어떤 상태가 되거나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 확실성의 정도.
* 잉걸불 : (1)불이 이글이글하게 핀 숯덩이. (2)다 타지 아니한 장작불.
* 전지(剪枝) : 식물의 겉모양을 고르게 하고 웃자람을 막으며, 과실나무 따위의 생산을 늘리기 위하여 곁가지 따위를 자르고 다듬는 일.
* 공그르다 : (1)헝겊의 시접을 접어 맞대어 바늘을 양쪽의 접힌 시접 속으로 번갈아 넣어 가며 실 땀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속으로 떠서 꿰매다. (2)[북한어] 바닥을 높낮이가 없도록 평평하게 만들다.
* 까라지다 : 기운이 빠져 축 늘어지다.
* 녹신거리다 : 맥이 빠져 자꾸 나른하게 되다.
* 비산 : 날아서 흩어짐.
* 선연하다 : 실제로 보는 것같이 생생하다.
* 격철 : 격발 장치의 하나. 방아쇠를 당기면 용수철이 늘어나 공이를 쳐서 뇌관을 폭발하게 하는 부분이다.
* 공이 : (1)절구나 방아확에 든 물건을 찧거나 빻는 기구. (2)탄환의 뇌관을 쳐 폭발하게 하는 송곳 모양의 총포(銃砲)의 한 부분.
6~7p.
눈을 떴는데도 어둠이 시야를 압도한다. 검은 헝겊 같은 걸로 눈이 가려져, 수없이 교직된 날줄과 씨줄 사이로 빛의 티끌이 새어 들어온다.
7p.
입술과 코에 맴도는 공기의 온도나, 뺨에 닿는 촉촉한 풀잎으로 미루어 갓밝이 무렵이다.
7p.
시각이 차단당하여 새소리와 풀 냄새 사이에서 촉각마저 길을 잃는다.
10p.
늘 생각하되, 생각에서 행동까지 시간이 걸리면 안 돼. 생각은 매 순간 해야 하지만, 생각에 빠지면 죽어.
35~36p.
⎯ 생각은 계속해도 좋아. 그런데 생각에 빠지는 건 안 돼.
계속하는데, 계속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는데…… 빠져들지 않을 방법이, 익사하지 않을 도리가 도대체 있기나 한 건지, 모를 일이다.
50p.
기겁했다는 티를 내지 않도록 심상하게 대꾸하나 목소리에서 잔물결에서 잔물결마저 지우지는 못한다.
54p.
⎯ 보이지 않기 때문이에요. 알 수 없으니까요.
⎯ 아플 때보다 무서울 때 우는구나, 너.
드러낸 게 그냥 등이 아니라, 생살이 도려내진 자리에 나타난 근육과 뼈 같아서. 어쩌면 붉은 내장 같아서. 두려움이 흔들고 지나간 마음속에 한 문장의 기도가 남아 있어서.
55p.
산장에 펼쳐진 두 개의 침낭 사이로 스며드는 풀 냄새가 밤에는 한층 더 짙어진다. 건너편 침낭에서 고개만 내밀고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보통 누군가의 살을 베어냈다든지 뼈를 잘라냈다든지, 뼈와 힘줄 사이에 박혀 아무리 칼날을 깊이 쑤셔도 빠져나오지 않았다던 탄환과, 그것을 맞은 사람이 서서히 죽어가던 모습에 대한 것이다. 바람과 나뭇잎의 탄주(彈奏) 사이로 들려오는 그의 말소리는 자장가처럼 그녀의 귓가에 내려앉아, 찢기어 원본의 형태를 잃은 꿈의 갈피 사이로 스며든다.
62p.
그는 다섯 손가락을 펴서 그녀의 하복부를 감싸듯이 가리키곤 말을 이어간다.
⎯ 여기 보존 잘해야 한다는 건 결혼을 하고 애를 낳으라는 게 아니야. 여기 망가져서 뽑아내면 힘을 못 쓴다고. 한동안은 보리차 주전자도 들기 힘들다고. 왠지는 나한테 묻지 말고. 그냥 그렇게 생겼고 그렇게 불공평하게 만들어졌다고. 몸이.
64p.
그녀는 서서 쏘고, 앉아서도 쏘고, 엎드려서도 쏜다. 산 전체에 총성을 새겨 넣고 화약흔을 묻힌다. 그의 손이 어깨와 턱 그리고 옆구리를 건드리며 자세를 바로잡는 것이 신경 쓰이지만 명중률은 나쁘지 않다. 그리고 그녀는 이 손길이, 훗날 설령 그가 없는 동안에라도 자신의 몸속에 잔존하리라는 것을 안다.
67p.
⎯ 그리고 대답은 짧게, 얼버무리지 말고.
그는 알지 못한다. 그녀가 입을 열면, 소리를 내면...... 입 속에서 너울거리는 나비의 날갯짓을 해금해버리면. 그가 알아서는 안 되고 알 필요 없는, 그러나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마음이 불현듯 튀어나올까 두려움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그건 아마 흘러나오거나 새어 나오는 고요하고 점잖은 방식이 아니라, 얼기설기 서툴게 꿰맨 자리가 잡아채어 뜯기면서 비집고 나오는 모습일 것이다. 그 자리엔 주워 담을 수 없는 말이, 찢긴 나비의 날개처럼 흩어져 있을 것이다. 그 파편의 형태를 상상하다가 그녀는 침묵으로 엮은 울타리에 이윽고 날붙이를 댄다.
⎯ 물어볼 게 있는데요.
81p.
그렇게 말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지 않기를, 심장박동이 그에게 전해지지 않기를, 끝까지 그 무엇도 폭로하지 않은 채 수납 후 봉할 상자의 깊이와 넓이가 자기 안에 무한하기를 바라며 그녀는 심드렁하게 말을 돌린다. 도구의 유용성을 칭찬하는 그의 말과 팔에 도취되지 않도록.
89p.
그의 말이 공이가 되어 뇌관을 때리는 바람에 그녀는 끝내 통곡하고 만다. 몸 안에서 이제 막 펼쳐진 깃발이 구조 요청이나 항복 선언처럼 나부낀다.
95p. <작가의 말>
그리고 저는 그녀가 완벽하지 않아서 좋습니다. 건강하지 않은 사고와 유해한 감정을 품을 수 있는 사람이어서 좋습니다. 넘치게 받은 사랑의 이유 가운데 상당 부분이, 그 완전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은 모습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덕분에 결격을 안은 쓰기를 계속할 수 있어서 고맙습니다.
<파쇄>에서 얻어 꼭 써보고픈 표현과 단어
* 강선 : 총포의 내부에 나사 모양으로 판 홈. 탄환이 목표물에 깊이 박히도록 돌면서 나가게 한다.
* 환후(幻嗅) : 실제로 나지 아니하는 냄새를 맡는 환각 현상
* 도저하다 : (1)학식이나 생각, 기술 따위가 아주 깊다. (2)행동이나 몸가짐이 빗나가지 않고 곧아서 훌륭하다.
* 응달 : 볕이 잘 들지 아니하는 그늘진 곳.
* 함소 : (1)웃음을 머금음. (2)꽃이 피기 시작함을 비유적으로 이루는 말.
* 공산 : 어떤 상태가 되거나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 확실성의 정도.
* 잉걸불 : (1)불이 이글이글하게 핀 숯덩이. (2)다 타지 아니한 장작불.
* 전지(剪枝) : 식물의 겉모양을 고르게 하고 웃자람을 막으며, 과실나무 따위의 생산을 늘리기 위하여 곁가지 따위를 자르고 다듬는 일.
* 공그르다 : (1)헝겊의 시접을 접어 맞대어 바늘을 양쪽의 접힌 시접 속으로 번갈아 넣어 가며 실 땀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속으로 떠서 꿰매다. (2)[북한어] 바닥을 높낮이가 없도록 평평하게 만들다.
* 까라지다 : 기운이 빠져 축 늘어지다.
* 녹신거리다 : 맥이 빠져 자꾸 나른하게 되다.
* 비산 : 날아서 흩어짐.
* 선연하다 : 실제로 보는 것같이 생생하다.
* 격철 : 격발 장치의 하나. 방아쇠를 당기면 용수철이 늘어나 공이를 쳐서 뇌관을 폭발하게 하는 부분이다.
* 공이 : (1)절구나 방아확에 든 물건을 찧거나 빻는 기구. (2)탄환의 뇌관을 쳐 폭발하게 하는 송곳 모양의 총포(銃砲)의 한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