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p. 프롤로그
창세기가 거꾸로 펼쳐진 끔찍한 지진 속에서, 그가 꼼꼼하게 이름 붙인 물고기 수천 마리가 다시 수북이 쌓인 미지의 존재들로 되돌아갔다.
17p. 프롤로그
그 지진이 전하는 명백한 메시지, 즉 혼돈이 지배하는 이 세계에서 질서를 세우려는 모든 시도는 결국 실패할 운명이라는 메시지에 그는 귀 기울이지 않았다.
18p. 프롤로그
그가 바늘로 이뤄낸 혁신은 너무 허술하고 너무 근시악적이며, 자신을 지배하는 힘에 대한 어마어마한 무지를 보여주었다. 그는 내게 오만에 대한 교훈으로, 어류 수집계의 이카로스처럼 보였다.
18p. 프롤로그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내게 찾아온 혼돈에 뒤흔들리고, 내 손으로 직접 내 인생을 난파시킨 뒤 그 잔해를 다시 이어 붙여 보려 시도하고 있을 때, 문득 나는 이 분류학자가 궁금해졌다. (...) 자기가 하는 일이 효과가 있을 거라는 확신이 전혀 없을 때에도 자신을 던지며 계속 나아가는 것은, (이렇게 생각하는 게 죄악 같은 느낌이 들긴 하지만) 바보의 표지가 아니라 승리자의 표지가 아닐까 생각했다.
19p. 프롤로그
타인의 삶에서 안내를 받고 싶어 하는 길 잃은 저널리스트
23p. 별에 머리를 담근 소년
데이비드 조던은 뉴욕주 북부의 한 사과 과수원에서, 1851년 한 해 중 가장 어두운 시간에 태어났다. 어쩌면 이것이 그가 별에 그토록 몰두하게 된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26p. 별에 머리를 담근 소년
착한 소년답게 데이비드는 어머니의 말을 들었다. (...) 하지만 진짜 소년답게 데이비드는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았다.
26p. 별에 머리를 담근 소년
자신의 죄를 지구 탓으로 돌리려는 건지 데이비드는 이렇게 썼다. "우리 시골집 주변에는 다양한 들꽃이 아주 많았다."
28p. 별에 머리를 담근 소년
"작은 것들은 아름답지는 않아도, 단 한 종류의 큰 꽃 백 송이보다 내게는 더 큰 의미가 있다. 미적 관심과 구별되는 과학적 관심을 보여주는 특별한 증거는 숨어 있는 보잘것없는 것들에게 마음을 쓰는 일이다."
숨어 있는 보잘것없는 것들.
29p. 별에 머리를 담근 소년
그는 혼자만의 재미에 빠져든 일에 관해서도 썼다. 이를테면 모험소설과 시를 즐겨 읽고, "두 손을 맞잡고 그 사이 공간으로 점프하려" 시도하느라 기운을 다 빼버린 일들 말이다.
31p. 별에 머리를 담근 소년
심리학자들은 이처럼 괴로운 시기에 수집이 줄 수 있는 달콤한 위안에 관해 연구해왔다. 수십 년간 강박적인 수집가들과 상담해온 심리학자 워너 뮌스터버거Werner Muensterberger는 《수집: 다루기 어려운 열정Collecting: An Unruly Passion》에서 수집 습관이 모종의 "박탈 혹은 상실 혹은 취약성"이 발생한 후 급격히 심각해지는 경우가 많으며, 새롭게 하나를 수집할 때마다 수집가에게는 폭발적인 도취감을 주는 "무한한 힘의 환상"이 흘러넘친다고 말했다.
31p. 별에 머리를 담근 소년
그라나다대학에서 수년간 수집가들을 연구한 프란시스카 로페스-토레시야스Francisca López- Torrecillas는 스트레스나 불안을 겪는 사람들이 수집에 의지해 고통을 달랜다며 비슷한 현상을 지적했다. "사람들이 이렇게 자신의 무력함을 느낄 때는 강박적인 수집이 기분을 끌어올리는 데 도움이 된다." 뮌스터버거가 지적하듯, 유일한 위험은 여느 강박과 마찬가지로 수집 습관이 "신나는" 일에서 "파멸적인" 일로 바뀌는 어떤 지점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38p. 어느 섬의 선지자
조던은 비참했다. 지리적으로도 영적으로도 고립된 느낌이었다.
47p. 어느 섬의 선지자
그는 자신이 추구하는 것들을 너무나도 시답잖게 여겼던 어머니와 이웃들, 학우들을 설득할 수 있는 말을 마침내 여기서 발견한 것이다.
57p. 신이 없는 막간극
"넌 중요하지 않아"라는 말은 아버지의 모든 걸음, 베어 무는 모든 것에 연료를 공급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너 좋은 대로 살아."
61p. 신이 없는 막간극
그 어디에도 갈 만한 곳이 없는 것 같다고 생각하던 기억이 난다. 바깥세상이 내미는 건 악의에 찬 복도들, 텅 빈 수평선들뿐이며, 안쪽 세상이 내미는 것은 쾅쾅 닫히는 문들뿐이라고. 빛을 발하는 건 전혀 보이지 않아, 1999년 4월 8일 일기에 쓴 말이다.
62p. 신이 없는 막간극
점검 완료. 발끝으로 살금살금 걸어 지하실로 내려갔다. 동물은 죽을 준비를 할 때 굴을 파고 들어가는 경향이 있다는 말을 아직 읽기 전의 일이다. 내가 알고 있는 건 그냥 내가 지하실로 끌린다는 것뿐이었다. 나는 작은 플라스틱 포장에서 알약을 한 알 한 알 꺼내 입 안에 집어넣는 의식을 치렀다. 1분에 한 알씩. 무신론자들도 의식은 좋아한다.
68p. 신이 없는 막간극
부인이 반드시 굴욕으로 이어지는 길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어쩌면, 혹시 어쩌면, 그의 발자국을 따라가다 보면 나도 언젠가 희미한 빛을 발하는 삶으로 되돌아가는 길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미.
76p. 꼬리를 좇다
나는 온순하고 음울하며, 먼지를 뒤집어쓴 것처럼 창백한 이 남자가 아무에게도 눈에 띄지 않을 채 미끄러지듯 슬그머니 지나다니다가, 어느새 어떤 목적의 빛으로, 공기로, 빛나는 물질로, 뭐가 되었든 아무튼 그 목적으로 서서히 차오르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목적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77p. 꼬리를 좇다
7월의 어느 늦은 밤, 우주가 손목 관절을 우두둑 꺾으며 공기 중에 숨어 있던 이온들의 작은 주머니들을 터뜨리고, 벼락으로 전신선을 때려 데이비드의 연구실 아래층 사무실로 불꽃을 날렸다.
93p. 유리단지에 담긴 기원
이름으로 불리는 순간 개념은 현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실재"가 된다. 우리는 전쟁, 휴전, 파산, 사랑, 순수, 죄책감을 선언할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의 삶을 바꿔놓을 수 있다. 이렇듯 아이디어를 상상의 영역에서 세상의 영역으로 끌어오는 운송 수단인 이름 자체는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
98p. 유리단지에 담긴 기원
이런 것들이 우리 존재의 출발점이라니 정말 이상했다. 배아 단계에서는 우리 모두가 거의 비슷한 모양이라니 생각만 해도 너무 이상했다.
100p. 유리단지에 담긴 기원
데이비드는 이렇게 썼다. "그리하여 나의 가장 친밀한 옛 친구가, 내가 교류했던 이들 가운데 가장 총명한 정신을 지닌 이들 중 하나가 내 인생에서 사라졌다."
101p. 유리단지에 담긴 기원
그는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느낌, 혀에 닿는 달콤함, 질서정연함과 행위 주체성의 감각을 다시금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세계는, 그 거대한 세계는 조용히, 참을성 있게 앉아서 그가 틀렸음을 증명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111p. 박살
당신 삶의 30년이 한순간에 수포로 돌아간 모습을 보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무엇이든 당신이 매일 하는 일, 무엇이든 당신이 소중히 여기는 일, 그것이 아무 의미 없다고 암시하는 모든 신호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중요한 것이기를 희망하면서 당신이 매일같이 의지를 모아 시도하는 모든 일들을 떠올려보라. 그리고 그 일에서 당신이 이뤄낸 모든 진척이 당신의 발치에서 뭉개지고 내장이 튀어나온 채 널브러져 있는 걸 발견했다고 상상해보라.
111p. 박살
그 47초 사이에 창세기가 뒤집혔다.
113p. 박살
하지만 받아들이자. 이것이 우주가 우리에게 준 것이다. 혼돈이 지배한다는 것, 나에게는 이보다 더 분명한 메시지는 없어 보였다.
118p. 박살
혼돈의 그 작은 덩굴손 하나가 데이비드의 가차 없는 끈기 덕분에 다시 질서 속으로 돌아온 것이다.
123p. 파괴되지 않는 것
나는 먼저 그가 쓴 동화부터 읽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동화가 도덕적 가르침을 가장 노골적으로 펼쳐놓는 형식일 테니까.
124p. 파괴되지 않는 것
그가 쓴 이야기들은 대부분 이런 특징을 갖고 있다. 등장인물들이 우주의 차가운 법칙을 피해갈 수 없는 폐쇄공포증적 세계를 그린다.
125p. 파괴되지 않는 것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화형을 당하기 전 브루노는 이렇게 일갈했다고 한다. "무지는 세상에서 가장 유쾌한 학문이다. 아무런 노동이나 수고 없이도 습득할 수 있으며, 정신에 우울함이 스며들지 못하게 해주니 말이다." 그리고 데이비드는 이 인용문을 독자들에게, 만약 그들이 행복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실을 차단해버린 적이 있다면 그들 역시 브루노를 살해한 자들과 다르지 않다고 경고하고 비난하는 데 사용했다.
125p. 파괴되지 않는 것
인간이 살아가는 방법은 매번 숨 쉴 때마다 자신의 무의미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거기서 자기만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말이다.
127~128p. 파괴되지 않는 것
데이비드는 나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사람에게는 동정심을 거의 느끼지 않는다. 《절망의 철학》의 최종 결론은 절망이 선택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절망이 청소년기에 자연스럽게 거쳐 가는 단계라고 생각하기는 해도 그런 감정을 떨쳐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경멸한다. 그는 그런 사람들은 "축 늘어진 정신의 유행"을 따르고, 문학 속 "슬픈 왕들"을 흉내 내는 게으른 모방자들이며, 그들이 "지옥불 같은" 숨결을 내뿜는다고 비난한다. 죽음의 냄새라는 것이다.
128p. 파괴되지 않는 것
그 모든 것의 허망함을 곱씹는 데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몹쓸 짓인 이유는, 진화가 선물한 그 소중한 전기를, 너무나 많은 경이로운 감각들을 느끼고 너무나 많은 과학적 수수께끼를 푸는 데 써야 할 그 신성한 이온들을 실존적 탐구라는 하수구로 흘려보냄으로써 글자 그대로 "몸이 아직 살아 있는데도 죽은 사람"이 되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익숙한 수치심이 나를 덮치는 것을 느꼈다.
128p. 파괴되지 않는 것
"이러한 인생관은 염세주의로 이어지는가?" 강의가 끝나갈 무렵 그는 학생들에게 일종의 마술 같은 주문을 걸었다. 혼돈이 주는 냉기를 떨쳐버리는 한 가지 방법을 말이다. 특별한 활자체로 된 여덟개의 단어.
생명에 대한 이런 시각에는 어떤 장엄함이 깃들어 있다.
129p. 파괴되지 않는 것
장엄함은 존재해. 네가 그걸 보지 못한다면 부끄러운 줄 알아.
129p. 파괴되지 않는 것
나는 모든 활동에 알코올음료를 꼭 하나씩 끼워 넣었고, 거기에 하나를 더, 또 하나를 더 끼워 넣었다. 아무 근거 없이 흡족함을 느끼는 건 아주 기분 좋은 일이었다. 나는 나의 웃음을, 내 미소를 만들어주는 샘을 되찾을 수 있었다.
130p. 파괴되지 않는 것
자신이 쓴 단어들이 다른 사람 앞에서 제대로 된 효과를 내지 못하고 철퍼덕 떨어져 내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말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생각들을 머릿속에 품고 있는 것이 얼마나 외로운 일인지를. 그리고 자기를 이해해주는 것처럼 보이는 소수의 사람들이 지닌 위험한 힘에 대해서도.
130~131p. 파괴되지 않는 것
모든 사람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그것을 카프카는 '파괴되지 않는 것'이라고 불렀어. 파괴되지 않는 것은 낙관주의와는 전혀 무관해. 낙관주의에 비하면 훨씬 더 심오하고 자의식은 훨씬 덜하지. 우리는 그 파괴되지 않는 것을 온갖 종류의 다른 상징과 희망과 야심 등으로 가리고 있어. 이런 상징과 희망과 야심은 그 밑에 무엇이 있는지 인정하라고 강요하지 않으니까. 음... 만약 그 모든 잉여를 제거한다면(혹은 제거할 수밖에 없게 된다면), 파괴되지 않는 그것을 찾게 될 거야. 그리고 우리가 일단 그것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면(카프카는 여기서 더 깊게 들어가. 그는 우리가 파괴되지 않는 것을 낙관적이거나 긍정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해주지 않아), 그것은 실제로 우리를 찢어발기고 파괴할 수도 있어.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거지....
131p. 파괴되지 않는 것
파괴되지 않는 것은 바보들이 겪는 고통처럼 보였다. 바보들, 낭만주의자들, 슬픈 왕들을 사랑하는 흉내쟁이들, 내면의 열정이라는 연료가 너무 강력하게 피어올라 현실감각이 안개처럼 흐려진 사람들.
133p. 파괴되지 않는 것
사람의 내면에 있는 것은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보다 더 위대하다.
137p. 기만에 대하여
생각해보니, 자기기만이라는 게 과연 그렇게 나쁜 일인가 하는 궁금증도 생겼다.
138~139p. 기만에 대하여
실제로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은 자신을 실제보다 더 매력적이고, 남들을 더 잘 도우며, 더 지적이고, (주사위를 던지거나 복권 번호를 뽑는 것 같은) 우연한 사건들을 가능한 정도보다 훨씬 더 잘 통제하는 사람으로 평가한다는 것이 꾸준히 확인됐다. 그 사람들은 과거를 돌아볼 때도 자기가 실패한 것보다 성공한 것들을 훨씬 더 쉽게 기억해냈다. 미래를 내다볼 때는 친구들이나 급우들보다 자신이 성공할 가능성을 훨씬 더 크게 잡았다.
140p. 기만에 대하여
순한 거짓말, 하얀 거짓말, 작은 장미봉오리 같은 거짓말은 무척 이로운 효과를 낼 수 있다. 요컨대 힘들어하는 어떤 사람을 붙잡고 그 사람이 자신에 관해 품고 있는 이야기를 약간 더 긍정적인 이야기⎯그가 실제보다 조금 더 강한 사람, 실제보다 더 친절한 사람으로 그려지는 이야기, 연인과의 이별에서 자신의 잘못이 겉보기만큼 그렇게 크지 않게 보이는 이야기⎯로 이끌어갈 수 있다면, 그 사람의 인생에 심오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140p. 기만에 대하여
버지니아대학의 심리학자 팀 윌슨Tim Wilson은 이야기를 살짝 조정하는 것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을 수 있다는 점에 감명 받아 그중 가장 극적인 결과들을 모아 《방향 바꾸기Redirect》라는 책을 펴냈다. "스토리 에디팅"을 받은 대학생들은 더 높은 학점을 받고, 중퇴하는 비율이 줄었으며, 심지어 여러 해 뒤에는 건강이 더 좋아졌다. 직장인들은 출근하는 비율이 더 높아졌다. 또 정신적 충격을 입은 사람들에게 자신에게 벌어진 그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수정하도록 가르치자 평온한 감정을 회복하는 시간이 더 빨라졌다.
141p. 기만에 대하여
어쩌면 진화가 우리에게 준 가장 위대한 선물은 "우리는 실제보다 더 큰 힘을 지니고 있다"는 믿음을 품을 수 있는 능력인지도 모른다.
141~142p. 기만에 대하여
심리학자들은 인간으로 산다는 건 가혹한 운명이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우리는 세상이 기본적으로 냉담한 곳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성공은 보장되지 않고, 수십만 명을 상대로 경쟁해야 하며, 자연 앞에서 무방비 상태이고, 우리가 사랑한 모든 것이 결국에는 파괴될 것임을 알면서도 이렇게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작은 거짓말 하나가 그 날카로운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낼 수도 있고, 인생의 시련 속에서 계속 밀고 나아가도록 도와줄 수도 있으며, 그 시련 속에서 가끔 우리는 우연한 승리를 거두기도 한다.
142p. 기만에 대하여
그릿. 끈질김을 뜻하지만 그보다 귀에 착 붙는 단어, 그릿. "긍정적 피드백"이 없는데도 "매우 장기적인 목표"에 로봇처럼 뛰어들게 해주는 것, 그릿. 머리로 벽을 반복적으로 들이받을 수 있는 능력.
144~145p. 기만에 대하여
그의 생애를 들여다보면 벌어지는 불행을 실시간으로 막아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는 디즈니의 룸펠슈틸츠헨 캐릭터와 좀 비슷하다. 어떤 거부나 모욕이나 실패도 받아들여 그것을 마치 마법처럼 칭찬으로 바꿀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회고록의 한 부분에서 그는 여러 실패를 아무렇지 않게 칭찬의 꽃다발로 바꿔놓는 재주를 선보인다.
대학 때 그는 식물학 분야에서 어떤 상의 수상 후보로 올랐다가 탈락했는데, 그의 설명에 따르면 자신의 사고가 표준화된 시험이 포착하기에는 너무 광범위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곤충학 분야에서 상을 받지 못한 이유는 자기가 너무 아량이 넓어서였으며(더 가난한 학생이 상금을 받을 수 있도록 "물러섰다"는 것이다), 프랑스사에서 상을 받지 못한 것은 자기가 너무 윤리적이기 때문(상의 규칙이 "불공정"하다고 판단해 스스로 시도할 기회를 박탈했단다)이라고 했다. (...)
데이비드가 잠재적으로 자기 인격에 가해질 공격을 능수능란하게 막아내는 걸 보면 참으로 놀랍다.
146p. 기만에 대하여
기만의 기이한 연금술이 바로 눈앞에서 펼쳐졌다. 작은 거짓말들이 동으로, 은으로, 금으로 변했다. 겸손을 유지하라는 수천 년 이어져온 경고는 잊어라. 어쩌면 이것이 신이 없는 세계의 시스템이 작동하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지속적으로 오만을 복용하는 것이야말로 실패할 운명을 극복하는 최선의 방법임을 보여주는 증거인지도 모른다.
146p. 기만에 대하여
"모든 시대에는 그 시대가 가져 마땅한 미치광이들이 생겨난다." 영국의 역사가 로이 포터Roy Porter가 언젠가 쓴 말이다.
147~148p. 기만에 대하여
"자기고양self-enhancement"에 관한 수백 건의 연구를 메타 분석한 마이클 더프너Michael Dufner는 과도한 자신감을 보이는 사람들의 자기과시가 다른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지만 정작 자신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결국 공동체 안에서 좋은 평판을 받을 때 얻을 수 있는 혜택을 놓치기도 한다는 걸 발견했다. (...)
사회적인 측면에서만 손해를 보는 게 아니다. 자기기만의 두꺼운 거품벽 안에 있으면 고통이 서서히 축적될 수 있다. (...) 로빈스와 비어는 그들이 스스로 실망을 자초하는 것이라고, 즉 "단기적으로 혜택을 얻는 대신 장기적으로 비용을 치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서 기만은 나중에라도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이다. 장밋빛 렌즈의 힘에는 한계가 수반된다. 그리고 그 힘이 떨어지면 자신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정말로 따끔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150p. 기만에 대하여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아주 편안하게 받아들이며, 비판을 받아도 자기 가치가 위협받는다고 느끼지 않으므로 높은 자존감은 당사자를 기이할 정도로 평화롭게(그들의 표현으로는 "이례적으로 비공격적으로") 만들 수도 있다고 했다. 그들은 자존감이 높기는 하지만 자존감에 대한 위협을 쉽게 느끼는 극히 소수의 사람만이 위험한 이들이라고 생각했다.
바우마이스터와 부시먼은 이렇게 썼다. "쉽게 말해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자신을 우월한 존재라고 보는 사람들이라기보다 자신을 우월한 존재로 보고 싶다는 욕망이 강한 사람들이다. (...) 거창한 자기상을 확인받는 일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비판당하는 것을 몹시 괴로워하며 자기를 비판한 사람을 사납게 공격하는 것으로 보인다."
158p. 세상에서 가장 쓴 것
막막한 공포에 사로잡힌 제인은 자기 바로 위 또는 자기 내부 어딘가에 있는 무언가를 응시하며, 이가 없는 잇몸으로 애원했다. "오, 하느님. 저의 죄를 용서해주세요."
168p. 세상에서 가장 쓴 것
그 책이 그렇게 얇은 것은 로버트 커틀러가 미래에 주는 선물, 헛소리를 걸러내고 진실만을 담고자 한 그의 노력의 결과다.
173p. 세상에서 가장 쓴 것
나는 데이비드가 엄지손가락으로 그 카드를 단단히 붙잡고 내용을 읽는 모습을 그려보다가, 작은 혐오감의 전율을 느꼈다.
174p. 세상에서 가장 쓴 것
데이비드가 한 일이라고 의심하고 있는 바로 그 일을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니까 자신의 세계관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자신감은 부패를 불러온다는 내 아버지의 믿음을 확인하기 위해 사실들을 왜곡하는 일을?
174p. 세상에서 가장 쓴 것
데이비드에 대한 의심이 점점 커져가고 있음에도 나는 그의 좋은 면을 발견하도록, 그 좋은 면에 귀를 기울이도록 나 자신에게 강요했다.
175p. 세상에서 가장 쓴 것
나는 제시가 데이비드를 자기 인생의 "기적"이라고 쓴 회상의 글을 조심스레 읽었다. 그가 쓴 여러 편의 시들, 해면동물과 불가사리와 심지어 풀까지 이 세계의 숨어 있는 보잘것없는 것들에 부치는 송시들을. 또 그가 남획으로 죽어가는 물개를 보호하기 위해 지치지 않고 펼친 노력에 관해 읽었다. 그가 말년에 열정적으로 평화를 옹호한 일로 받은 무거운 메달들을 들어보았다. (...) 나는 그가 노예제도 폐지론자였던 젊은 시절, 가슴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작은 가죽 장정 일기장의 냄새를 맡았다. 녹인 버터 냄새가 났다. 거기서 애벌레들과 거미, 나뭇잎을 그린 그림들이 쏟아져나왔다.
175p. 세상에서 가장 쓴 것
나는 빈손으로 집에 돌아왔다. 언제나처럼 길을 잃은 채로.
179~180p. 진정한 공포의 공간
아오스타는 정신적・육체적 장애를 지닌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안식처 같은 도시였다. 수세기에 걸쳐 가톨릭교회는 장애 때문에 가족에게 거부당한 사람들을 아오스타로 불러들여 주거와 음식을 제공하고 돌보아왔다. 그들 중 많은 수가 결국에는 밭이나 부엌의 능숙한 일꾼들이 되었고, 그중 많은 이들이 사랑에 빠지고 결혼하고 자녀를 낳았다. 그 결과 일종의 거꾸로 뒤집힌 마을이 만들어졌다. 비정상적인 것이 정상인 곳, 사회에서 무능력자 취급을 받던 사람들이 지원을 받아 번성하는 곳으로 말이다.
누군가는 이 마을에서 어떤 아름다움을,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사람들이 존엄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도와주는 근본적으로 인간적인 방식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1880년대에 이곳을 방문한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그곳을 "거위보다 지능이 낮고 돼지보다 품위가 떨어지는", "피조물들"이 들끓는 "진정한 공포의 공간"으로 묘사했다.
182p. 진정한 공포의 공간
심지어 《캔트세이웨어 우생학 칼리지The Eugenic College of Kantsaywhere》라는 SF 소설까지 썼다. 엄격한 테스트를 통과한 사람들만 자식을 낳을 수 있도록 허가하고, 그 밖의 사람들이 자식을 가지려고 시도하면 투옥하고 "가차 없고 엄격하게" 처벌하는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였다. 골턴은 이 소설이 행복한 이야기이자, 인류를 쇠퇴에서 구하는 안내서라고 여겼다.
183p. 진정한 공포의 공간
부적합자! 단박에 귀를 사로잡으며 매우 암시적이고 너무나 깔끔한 단어. 그것은 어떤 사람들이 살 자격이 있는가에 관한 그의 의견에 과학의 망토를 둘러줄 수 있는 단어였다. 부적합자! 그냥 한 남자의 판단이 아니라, 자연에 존재하는 현실 자체.
순회 연설을 다닐 때면 데이비드는 교회와 빈민구호소에 꼭 들러서 헌신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노력이 "부적합자 생존"이라는 위험을 유발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188~189p. 진정한 공포의 공간
"인간은 눈에 보이는 외부 형질에만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 자연은 외양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 자연은 모든 내부 기관과 모든 미세한 체질적 차이에, 생명의 전체 조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191p. 진정한 공포의 공간
가난이나 범죄성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것은 소용돌이처럼 복잡하고 은밀하게 작용하는 환경 요인들 때문이라는 것이 지금은 확고히 규명된 상태다.
201p. 사다리
오싹했다. 그 잔인성과 무자비함이. 그 추락의 무지막지한 깊이와 그 파괴적 광란의 크기가. 토할 것 같았다. 내가 모델로 삼으려 했던 자는 결국 이런 악당이었던 것이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생각에 대한 확신이 너무나 강한 나머지, 이성도 무시하고 도덕도 무시하고, 자기 방식이 지닌 오류를 직시하라고 호소하는 수천 명의 아우성⎯나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인가니요⎯도 무시해버린 남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숨어 있는 보잘것없는" 것들에 몰두하고 관심을 기울이던 그 상냥했던 소년이, 어떻게 바로 그 숨어 있는 보잘것없는 존재들을 기꺼이 말살하려는 남자가 된 것일까? 그의 이야기 중 어느 지점에서 변한 것일까? 그리고 왜?
202p. 사다리
데이비드는 공개적으로는 자기기만을 그토록 공격했지만 사적으로는, 특히 시련의 시기에는 더욱더 자기기만에 의존했던 듯하다. 운명의 형태를 만드는 것은 사람의 의지다. "긍정적 착각은 견제하지 않고 내버려둘 경우 그 착각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이든 공격할 수 있는 사악한 힘으로 변질될 수 있다"고 경고한 그 심리학자들의 말이 옳았던 것 같다.
202p. 사다리
과도한 확신, 그릿, 자부심이 섞이면 위험한 혼합물이 만들어지는 것은 분명하지만,
205p. 사다리
동물은 인간이 스스로 우월하다고 가정하는 거의 모든 기준에서 인간보다 더 우수할 수 있다. 까마귀는 우리보다 기억력이 좋고, 침팬지는 우리보다 패턴 인식 능력이 뛰어나며, 개미는 부상당한 동료를 구출하고, 주혈흡충은 우리보다 일부일처제 비율이 더 높다. 지구에 사는 모든 생물을 실제로 검토해볼 때, 인간을 꼭대기에 두는 단 하나의 계층구조를 그려내기 위해서는 상당히 무리해서 곡예를 해야 한다.
206p. 사다리
이것이 바로 다윈이 독자들에게 알려주려고 그토록 노력했던 점이다. 사다리는 없다.
206~207p. 사다리
처음 다윈을 읽을 때부터 마지막으로 우생학을 밀어붙일 때까지 어느 시점에서든 그 믿음을 놓아버리는 것은 다시 현기증을 불러들이는 일이었을 것이다. 방금 자신의 형을 앗아간 세상 앞에서 상실감에 가득 차 떨고 있던 어린 소년으로 되돌아가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세상 앞에서, 그 세상을 전혀 이해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겁에 질린 무력한 아이로.
207p. 사다리
그것은 지독히도 방향 감각을 앗아가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혼돈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똑바로 바라보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써왔던 바로 그 세계관이었을 것이다.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없이, 개미들과 별들과 함께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떨어져 내리는 느낌. 소용돌이치는 혼돈의 내부에서 바라본, 차마 마주 볼 수 없을 만큼 눈부시고 가차 없고 뚜렷한 진실. 너는 중요하지 않아라는 진실을 흘낏 엿본 바로 그 느낌일 것이다.
207p. 사다리
그런 관점에서 보면 나는 그가 자연의 질서라는 비전을 그토록 단단하게 붙잡고 늘어졌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도덕과 이성과 진실에 맞서면서까지 그가 그렇게 맹렬하게 그 비전을 수호한 이유를. 바로 그 때문에 그를 경멸했음에도 어느 차원에서는 나 역시 그가 갈망한 것과 똑같은 것을 갈망했다.
208p. 사다리
혼돈을 이길 방법은 없고, 결국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거라고 보장해주는 안내자도, 지름길도, 마법의 주문 따위도 없다.
213p. 민들레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가 이 나라의 정체성을 정의할 때 우리가 반대하는 것이라 간주하는 그 사고방식, 우리가 초등학생에게 나치, 다른 사람들, 나쁜 놈들에게서 시작되었다고 가르치는 바로 그 악행, 그것을 세계 최초로 국가 정책으로 삼은 나라가 바로 우리였다.
220p. 민들레
자신에게서 자유와 유년기, 아이를 갖겠다는 꿈까지 너무나 많은 것을 앗아간 관념들을 전파한 데이비드 스타 조던 같은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애나는 화가 난다고 말했다. 그러나 애나는 분노에 초점을 맞추지 않으려고, 흉터를 쳐다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살고 있다.
221p. 민들레
이 거실은 살아 있다.
221p. 민들레
또한 그는 나 역시 부적합하다고 판단했을것이다. (...) 숨에서 유황을 내뿜는 인생의 낭비자.
222p. 민들레
우리는 중요하지 않다. 이것이 우주의 냉엄한 진실이다. 우리는 작은 티끌들, 깜빡거리듯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우주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존재들이다.
222p. 민들레
명민하고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호흡, 모든 걸음마다 우리의 사소함을 인정해야 한다.
222p. 민들레
아, 그것은 엉킨 실타래였다.
제 꼬리를 먹는 우로보로스.
복수를 하겠다고 나무로 기어 올라갔지만 높이 뜬 독수리라는 진실에 얻어맞아 나가떨어진 파란 꼬리의 스킹크.
나는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심정이었다.
224p. 민들레
메리가 수용소에서 자신을 보호해준 애나에게 영원히 은혜를 갚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보답하는 그 행위에서 진짜 의미를 발견했다는 것을.
226p. 민들레
천천히 그것이 초점 속으로 들어왔다. 서로서로 가라앉지 않도록 띄워주는 이 사람들의 작은 그물망이, 이 모든 작은 주고받음⎯다정하게 흔들어주는 손, 연필로 그린 스케치, 나일론 실에 꿴 플라스틱 구슬들⎯이 밖에서 보는 사람들에게는 그리 대단치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그물망이 받쳐주는 사람들에게는 어떨까? 그들에게 그것은 모든 것일 수 있고, 그들을 지구라는 이 행성에 단단히 붙잡아두는 힘 자체일 수도 있다.
226p. 민들레
바로 이런 점들이 내가 우생학자들에 대해 그토록 격노하는 이유다. 그들은 이런 그물망의 가능성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그들은 애나와 메리 같은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사회를 풍요롭게 만들 수 있고, 자신들이 받은 빛을 더욱 환하게 반사할 수 있는 이 실질적인 방식들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메리는 애나가 없었다면 수용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래, 이런 것. 이는 정말 대단한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죽는 것과 사는 것의 차이. 그게 아무 가치가 없다고?
226p. 민들레
바로 그때 그 깨달음이 내 머리를 때렸다. 그게 거짓말이 아니라는 깨달음. 애나가 중요하다는, 메리가 중요하다는 말. (...) 그 말은 거짓말이 아니라, 자연을 더욱 정확하게 바라보는 방식이다. 그것이 민들레 법칙이다!
228p. 민들레
인간이라는 존재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이 지구에게, 이 사회에게, 서로에게 중요하다.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질척거리는 변명도, 죄도 아니다. 그것은 다윈의 신념이었다! 반대로, 우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만 하고 그 주장만 고수하는 것이야말로 거짓이다. 그건 너무 음울하고 너무 경직되어 있고 너무 근시안적이다. 가장 심한 비난의 말로 표현하자면, 비과학적이다.
231p. 데우스 엑스 마키나
지구가 태양을 마주 보려 천천히 고개를 돌리고 있을 무렵이니, 그가 마지막으로 본 장면은 아마도 그의 첫 번째 사랑, 어스름한 새벽하늘에 남아 있는 별들이었을 수도 있겠다.
233p. 데우스 엑스 마키나
다시 말해서 그는 자신의 우생학적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평화주의자가 된 것이다.
235p. 데우스 엑스 마키나
이 세상은 우주적 정의의 감각 같은 건 그 까칠하고 무의미한 조직 속 어디에도 새겨져 있지 않을 만큼 야멸차기 때문이다.
235p. 데우스 엑스 마키나
이것이 끝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바닥 모를 혼란한 세계는 소매 속에 또 하나의 속임수를 감춰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데이비드의 질서를 파괴하고, 그에게 가장 소중한 그것을 훔쳐 갈 마지막 하나 남은 방법을. 이 세계가 마침내 그의 물고기 컬렉션을 단박에 허물어뜨린 그 은근하고 음흉한 방식을. (...) 아니, 자연의 방법은 훨씬 더 잔인했다. 자연은 그가 자기 손으로 직접 그 일을 하도록 만들었다.
235p. 데우스 엑스 마키나
1980년대에 분류학자들이 타당한 생물 범주로서 "어류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조류는 존재한다.
포유류도 존재한다.
양서류도 존재한다.
그러나 꼭 꼬집어, 어류는 존재하지 않는다.
238p. 데우스 엑스 마키나
모델에 추가된 참신한 업그레이드가 무엇인지 알아낼 수 있다면, 그 새로운 특징을 따라 생물들이 거쳐 간 다양한 버전들을 추적할 수 있고, 시간의 화살이 어느 길을 가리키고 있는지(좀 더 자신 있게) 추측할 수 있고, 더 큰 확신을 갖고 누가 누구를 낳았는지 단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발견은 단순했고, 미묘했고, 특출났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아주 놀라운 관계들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박쥐는 날개가 달린 설치류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낙타와 훨씬 더 가깝고, 고래는 실제로 유제류(발굽이 있는 동물로, 사슴이 속한 과)라는 사실이 그렇다.
238p. 데우스 엑스 마키나
그들은 직관이 가려버린 사실들 가운데 가장 어안이 벙벙한 예들을 제시했다. 새들이 공룡이라는 사실. 버섯은 식물처럼 느껴지기는 하지만 사실은 동물과 훨씬 가깝다는 사실.
241p. 데우스 엑스 마키나
육기어류肉鰭魚類, Sarcopterygii⎯폐어와 실러캔스coelacanth⎯는 우리와 상당히 가까우며,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의 진화적 사촌, 허파가 위에 있고 꼬리가 저 아래 있는 인어라고 할 수 있다.
241~242p. 데우스 엑스 마키나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게으름에 대한 경고의 예로 자주 지적하던, 고착생활을 하는 멍게(피낭동물)가 있다. 멍게는 엄밀히 말해(어쨌든 오늘날 분류학자들에 따르면) 척추동물은 아니지만, 척삭이라는 척추와 비슷한 구조물을 가장 먼저 선구적으로 갖춘 생물 중 하나다. 다시 말해 멍게는 퇴보한 존재가 아니라 정반대로 혁신가였던 셈이다.
"어류"라는 범주가 이 모든 차이를 가리고 있다. 많은 미묘한 차이들을 덮어버리고, 지능을 깎아내린다. 그 범주는 가까운 사촌들을 우리에게서 멀리 떼어놓음으로써 잘못된 거리 감각을 만들어내는데, 이는 상상 속 사다리에서 우리가 차지하는 제일 윗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242p. 데우스 엑스 마키나
어류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류"라는 범주는 존재하지 않는다.
데이비드에게 너무나도 소중했던 그 생물의 범주, 그가 역경의 시간이 닥쳐올 때마다 의지했던 범주, 그가 명료히 보기 위해 평생을 바쳤던 그 범주는 결코, 단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
245p. 데우스 엑스 마키나
윤의 고통이, 윤이 물고기를 잃은 "잔인한" 경험이 나에게는 무척 소중했다. 내가 윤을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대리인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245p. 데우스 엑스 마키나 - 보충 설명란
이걸 읽는 보상으로 당신은 자연계의 질서가 어쩌면 우리 내부에 장착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괴상한 사실을 배우게 될 것이다.
245p. 데우스 엑스 마키나 - 보충 설명란
질서를 만들어내는 일종의 메커니즘이 우리 내부에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러니까 우리가 자연을 분류하는 방법에 관한 매우 구체적인 믿음 체계를 획득할 수 있는 성향을 지니고 태어난다는 것을 암시한다. 누가 한 부류에 속하고, 누가 서로 다른 부류에 속하며, 누가 제일 윗자리를 차지하는지 등을 판단하는 분류법을 말이다.
246p. 데우스 엑스 마키나
그의 아픔을, 어느 정도는 고뇌를 느낄 그를 상상해보는 일... 그것은 나에게 경이로운 효과를 발휘했다. 그 상상은 무신론자에게는 가장 금기시되는 판타지로 내 피부를 콕콕 찔러댔다. 어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 밖, 혼돈의 차가운 수학 속에 결국 일종의 우주적 정의가 존재한다는 판타지 말이다.
247~248p. 데우스 엑스 마키나
헤더는 하고많은 사람 중에 코페르니쿠스를 예로 들었다. 그 시대 사람들이 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면서 움직이고 있는 게 별이 아니라는 걸 받아들이기가 얼마나 어려웠을지 이야기했다. 그럼에도 그에 관해 이야기하고, 그에 관해 생각하고, 별들이 매일 밤 그들 머리 위에서 빙빙 돌고 있는 천구의 천장이라는 생각을 사람들이 서서히 놓아버릴 수 있도록 수고스럽게 복잡한 사고를 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별들을 포기하면 우주를 얻게 되니까"라고 헤더는 말했다.
249p. 데우스 엑스 마키나
그 새로운 비전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너무 적었고, 아무리 노력해도 사람들의 확신을 조금이라도 무너뜨리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건, 음, 30년 동안 계속해온 전투였어요." 그가 한숨을 쉬었다.
250p. 데우스 엑스 마키나
애나는 그것이 "부적합"이라는 단어와 비슷한 게 아니냐고 물었다. 애나의 등짝에 찰싹 붙어 있는 단어. (...) 나는 그렇다고, 그것과 아주 비슷하다고 대답했다. 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물고기에 대해 연민이 느껴진다고 했다. 일단 무언가에 이름을 붙이고 나면 더 이상 그걸 제대로 바라보지 않게 된다는 사실에 대한 연민이었다.
251p. 데우스 엑스 마키나
그 "어류"라는 말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경멸적인 단어다. 우리가 그 복잡성을 감추기 위해, 계속 속 편히 살기 위해, 우리가 실제보다 그들과 훨씬 더 멀다고 느끼기 위해 사용하는 단어다.
252p. 데우스 엑스 마키나
나의 아버지는 "어류"라는 단어를 포기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 단어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이다. 과학적으로 정확하지 않다는 건 이해하지만 유용한 단어라고 생각했다. 그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세계를 경험하는 제한된 방식에 자신을 가두게 되는 것이 걱정되지 않느냐고 내가 묻자, 아버지는 불만스럽게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이고, 나는 그게 뭐든, 아직 내가 해방되지 않은 것으로부터 해방되기에는 너무 늙었어."
252p. 데우스 엑스 마키나
큰언니는 물고기를 놓아버리는 데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언니는 어류라는 범주 전체를 바로 손에서 놓아버렸다. 왜 언니한테는 그게 그렇게 쉬운 거냐고 묻자 이렇게 말했다. "왜냐하면 그게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인간은 원래 곧잘 틀리잖아." (...) "성장한다는 건,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말을 더 이상 믿지 않는 법을 배우는 거야."
정말로 이 물음은 모든 사람마다 다 다르다.
256~257p. 에필로그
* 새: 명백히 열등한 존재지만, 곡예 솜씨가 감탄스러움.
* 잠자리: 멀리 떨어져 있는 영혼, 거의 동물 같지 않음(날개가 달린 잔가지).
* 나무: 식물 중 가장 강한 존재.
* 버섯: 나무의 변형된 동생.
258p. 에필로그
그건 어쩐지 환원하는 동시에 비난하는 말처럼 느껴졌다.
260p. 에필로그
우리만의 사적인 아틀란티스.
261p. 에필로그
물고기들은 내가 그때까지 본 무엇과도 달랐다.
노란 앵무새들과 검은 천사들과 아콰마린색 달의 조각들. 상당한 크기의 자주색 물고기 하나는 내가 강아지처럼 자기를 졸졸 따라다니게 해줬다. 나는 벅찬 감동을 느꼈지만, 감동의 소리를 낼 수 없었다. 그 감동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물 위로 올라가야 했다. 나는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거기 그들이 있었다. 내가 그렇게 수없이 글로만 읽었던 존재들. 아직 내가 이름도 모르는 존재들.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그들의 피부 아래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나와 훨씬 더 비슷한 내장기관이 있다는 것, 나와 똑같은 이온이 흐르고 있는 뇌가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어류가 아니라는 것. 은빛 존재들 한 떼가 나를 향해 몰려오더니 잘하면 잡을 수도 있는 기차처럼 내 아래쪽에서 빠른 속도로 몰려다녔다. 나는 그 은빛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들은 갈라지며 나를 자기들 안으로 받아주었다. 수백 마리의 은빛 영혼들이 나를 감쌌다.
262p. 에필로그
이건 내가 그려왔던 인생이 아니었다. 체격이 아주 작고, 나보다 일곱 살이 어리며, 자전거 경주에서 나를 이기고, 툭하면 라를 향해 어이없다는 듯 눈동자를 굴리는 여자를 쫓아다니는 것은. 그러나 이건 내가 원하는 인생이다. 나는 범주를 부수고 나왔다. 자연이 프린트된 커튼 뒤를 들춰보았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무한한 가능성의 장소를 보았다. 모든 범주는 상상의 산물이다. 그건 세상에서 가장 근사한 느낌이었다.
263p. 에필로그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이 세계에 관해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은 또 뭐가 있을까? 우리가 자연 위에 그은 선들 너머에 또 어떤 진실이 기다리고 있을까? 또 어떤 범주들이 무너질 참일까? 구름도 생명이 있는 존재일 수 있을까? 누가 알겠는가. 해왕성에서는 다이아몬드가 비로 내린다는데 그건 정말이다. 바로 몇 년 전에 과학자들이 그 사실을 알아냈다. 우리가 세상을 더 오래 검토할수록 세상은 더 이상한 곳으로 밝혀질 것이다.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은 사람 안에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잡초 안에 약이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얕잡아봤던 사람 속에 구원이 있을지도 모른다.
264p. 에필로그
늘 거기 있었지만 어째선지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이 놓치고 있었던 것. 그러면 세계는 조금 더 벌어지며 열린다.
265~266p. 에필로그
나는 언니와 아버지가 그들만의 좀 이상한 방식이지만 가까운 사이가 될 거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막대빵에 대한 사랑을 공유하며 단둘이서만 제일 좋아하는 이탈리아 식당에 다니게 되리라는 것도. 때때로 언니가 아주 짧게 아버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모습을 보게 되고, 그 한순간 모든 행성의 무게가 사라져버리게 되리라는 것도.
268p. 에필로그
이 사다리, 그것은 아직도 살아 있다.
이 사다리, 그것은 위험한 허구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은 그 허구를 쪼개버릴 물고기 모양의 대형 망치다.
272p. 감사의 말
당신들은 줄곧 내 마음속의 소리 없는 천사들이었고, 응원과 유머와 격려의 파괴되지 않는 원천이었답니다. 거기 있어줘서 고마워요.
273p. 감사의 말
내게 처음으로 작은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가르쳐준 나의 어머니, 로빈 퓨어 밀러에게 감사합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내가 가장 어두운 날을 통과하는 동안 나를 붙잡아준 밧줄이었어요.
273p. 감사의 말
내게 처음으로 확실성을 조심해야 한다고 가르쳐준 작은언니 알렉사 로즈 밀러에게 감사합니다. 지난 20년 동안 언니는 의료계 전문가들에게 불확실성을 포용하는 방법과, 그렇게 하는 것이 왜 생명을 구하는 일인지 가르쳐왔습니다. 언니의 너무나 훌륭하고 도발적인 작업은 나의 사고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습니다.
273p. 감사의 말
나에게 강해지는 법에 관해 지구상 그 누구보다 많이 가르쳐 준 나의 큰언니 애비게일. 이 책에서 언니 삶의 일부를 이야기할 수 있게 해주고, 그렇게 맹렬히 나를 사랑해주고, 나를 그렇게 격하게 웃게 만들어준 것에 감사합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얻어 꼭 써보고픈 표현과 단어
* 동정(同定) : identification이란 생물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한 작업으로, 해당 생물 또는 표본이 속한 분류군과 정확한 이름을 알아내는 일이다.
* 병폐 : 병통(깊이 뿌리박힌 잘못이나 결점)과 폐단(어떤 일이나 행동에서 나타나는 옳지 못한 경향이나 해로운 현상)을 아울러 이르는 말.
* 서한문 : 편지에 쓰는 특수한 형식의 문체. 상대편에게는 경어(敬語)를 쓰고, 자신은 겸양(겸손한 태도로 남에게 양보하거나 사양함.)의 말을 쓰는 것이 특징이다.
* 일갈 : 한 번 큰 소리로 꾸짖음. 또는 그런 말.
* 쇄도 : (1)전화, 주문 따위가 한꺼번에 세차게 몰려듦. (2)어떤 곳을 향하여 세차게 달려듦.
* 땅뙈기 : 얼마 안 되는 자그마한 땅. 주로 논밭을 가리킨다.
* 그릿(Grit) : 끈질긴 투지
* 횡행하다 : (1)모로 가다. (2)아무 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행동하다.
* 예속 : 남의 지배나 지휘 아래 매임.
* 고갱이 : 풀이나 나무의 줄기 한가운데에 있는 연한 심.
* 송시 : 공덕을 기리는 시. 서정적 시가 문학의 한 형태이다.
* 회한 : 뉘우치고 한탄함.
* 논거 : 어떤 이론이나 논리, 논설 따위의 근거.
* 연무 : 연기와 안개를 아울러 이르는 말.
* 환원 : 본디의 상태로 다시 돌아감. 또는 그렇게 되게 함.
17p. 프롤로그
창세기가 거꾸로 펼쳐진 끔찍한 지진 속에서, 그가 꼼꼼하게 이름 붙인 물고기 수천 마리가 다시 수북이 쌓인 미지의 존재들로 되돌아갔다.
17p. 프롤로그
그 지진이 전하는 명백한 메시지, 즉 혼돈이 지배하는 이 세계에서 질서를 세우려는 모든 시도는 결국 실패할 운명이라는 메시지에 그는 귀 기울이지 않았다.
18p. 프롤로그
그가 바늘로 이뤄낸 혁신은 너무 허술하고 너무 근시악적이며, 자신을 지배하는 힘에 대한 어마어마한 무지를 보여주었다. 그는 내게 오만에 대한 교훈으로, 어류 수집계의 이카로스처럼 보였다.
18p. 프롤로그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내게 찾아온 혼돈에 뒤흔들리고, 내 손으로 직접 내 인생을 난파시킨 뒤 그 잔해를 다시 이어 붙여 보려 시도하고 있을 때, 문득 나는 이 분류학자가 궁금해졌다. (...) 자기가 하는 일이 효과가 있을 거라는 확신이 전혀 없을 때에도 자신을 던지며 계속 나아가는 것은, (이렇게 생각하는 게 죄악 같은 느낌이 들긴 하지만) 바보의 표지가 아니라 승리자의 표지가 아닐까 생각했다.
19p. 프롤로그
타인의 삶에서 안내를 받고 싶어 하는 길 잃은 저널리스트
23p. 별에 머리를 담근 소년
데이비드 조던은 뉴욕주 북부의 한 사과 과수원에서, 1851년 한 해 중 가장 어두운 시간에 태어났다. 어쩌면 이것이 그가 별에 그토록 몰두하게 된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26p. 별에 머리를 담근 소년
착한 소년답게 데이비드는 어머니의 말을 들었다. (...) 하지만 진짜 소년답게 데이비드는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았다.
26p. 별에 머리를 담근 소년
자신의 죄를 지구 탓으로 돌리려는 건지 데이비드는 이렇게 썼다. "우리 시골집 주변에는 다양한 들꽃이 아주 많았다."
28p. 별에 머리를 담근 소년
"작은 것들은 아름답지는 않아도, 단 한 종류의 큰 꽃 백 송이보다 내게는 더 큰 의미가 있다. 미적 관심과 구별되는 과학적 관심을 보여주는 특별한 증거는 숨어 있는 보잘것없는 것들에게 마음을 쓰는 일이다."
숨어 있는 보잘것없는 것들.
29p. 별에 머리를 담근 소년
그는 혼자만의 재미에 빠져든 일에 관해서도 썼다. 이를테면 모험소설과 시를 즐겨 읽고, "두 손을 맞잡고 그 사이 공간으로 점프하려" 시도하느라 기운을 다 빼버린 일들 말이다.
31p. 별에 머리를 담근 소년
심리학자들은 이처럼 괴로운 시기에 수집이 줄 수 있는 달콤한 위안에 관해 연구해왔다. 수십 년간 강박적인 수집가들과 상담해온 심리학자 워너 뮌스터버거Werner Muensterberger는 《수집: 다루기 어려운 열정Collecting: An Unruly Passion》에서 수집 습관이 모종의 "박탈 혹은 상실 혹은 취약성"이 발생한 후 급격히 심각해지는 경우가 많으며, 새롭게 하나를 수집할 때마다 수집가에게는 폭발적인 도취감을 주는 "무한한 힘의 환상"이 흘러넘친다고 말했다.
31p. 별에 머리를 담근 소년
그라나다대학에서 수년간 수집가들을 연구한 프란시스카 로페스-토레시야스Francisca López- Torrecillas는 스트레스나 불안을 겪는 사람들이 수집에 의지해 고통을 달랜다며 비슷한 현상을 지적했다. "사람들이 이렇게 자신의 무력함을 느낄 때는 강박적인 수집이 기분을 끌어올리는 데 도움이 된다." 뮌스터버거가 지적하듯, 유일한 위험은 여느 강박과 마찬가지로 수집 습관이 "신나는" 일에서 "파멸적인" 일로 바뀌는 어떤 지점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38p. 어느 섬의 선지자
조던은 비참했다. 지리적으로도 영적으로도 고립된 느낌이었다.
47p. 어느 섬의 선지자
그는 자신이 추구하는 것들을 너무나도 시답잖게 여겼던 어머니와 이웃들, 학우들을 설득할 수 있는 말을 마침내 여기서 발견한 것이다.
57p. 신이 없는 막간극
"넌 중요하지 않아"라는 말은 아버지의 모든 걸음, 베어 무는 모든 것에 연료를 공급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너 좋은 대로 살아."
61p. 신이 없는 막간극
그 어디에도 갈 만한 곳이 없는 것 같다고 생각하던 기억이 난다. 바깥세상이 내미는 건 악의에 찬 복도들, 텅 빈 수평선들뿐이며, 안쪽 세상이 내미는 것은 쾅쾅 닫히는 문들뿐이라고. 빛을 발하는 건 전혀 보이지 않아, 1999년 4월 8일 일기에 쓴 말이다.
62p. 신이 없는 막간극
점검 완료. 발끝으로 살금살금 걸어 지하실로 내려갔다. 동물은 죽을 준비를 할 때 굴을 파고 들어가는 경향이 있다는 말을 아직 읽기 전의 일이다. 내가 알고 있는 건 그냥 내가 지하실로 끌린다는 것뿐이었다. 나는 작은 플라스틱 포장에서 알약을 한 알 한 알 꺼내 입 안에 집어넣는 의식을 치렀다. 1분에 한 알씩. 무신론자들도 의식은 좋아한다.
68p. 신이 없는 막간극
부인이 반드시 굴욕으로 이어지는 길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어쩌면, 혹시 어쩌면, 그의 발자국을 따라가다 보면 나도 언젠가 희미한 빛을 발하는 삶으로 되돌아가는 길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미.
76p. 꼬리를 좇다
나는 온순하고 음울하며, 먼지를 뒤집어쓴 것처럼 창백한 이 남자가 아무에게도 눈에 띄지 않을 채 미끄러지듯 슬그머니 지나다니다가, 어느새 어떤 목적의 빛으로, 공기로, 빛나는 물질로, 뭐가 되었든 아무튼 그 목적으로 서서히 차오르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목적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77p. 꼬리를 좇다
7월의 어느 늦은 밤, 우주가 손목 관절을 우두둑 꺾으며 공기 중에 숨어 있던 이온들의 작은 주머니들을 터뜨리고, 벼락으로 전신선을 때려 데이비드의 연구실 아래층 사무실로 불꽃을 날렸다.
93p. 유리단지에 담긴 기원
이름으로 불리는 순간 개념은 현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실재"가 된다. 우리는 전쟁, 휴전, 파산, 사랑, 순수, 죄책감을 선언할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의 삶을 바꿔놓을 수 있다. 이렇듯 아이디어를 상상의 영역에서 세상의 영역으로 끌어오는 운송 수단인 이름 자체는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
98p. 유리단지에 담긴 기원
이런 것들이 우리 존재의 출발점이라니 정말 이상했다. 배아 단계에서는 우리 모두가 거의 비슷한 모양이라니 생각만 해도 너무 이상했다.
100p. 유리단지에 담긴 기원
데이비드는 이렇게 썼다. "그리하여 나의 가장 친밀한 옛 친구가, 내가 교류했던 이들 가운데 가장 총명한 정신을 지닌 이들 중 하나가 내 인생에서 사라졌다."
101p. 유리단지에 담긴 기원
그는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느낌, 혀에 닿는 달콤함, 질서정연함과 행위 주체성의 감각을 다시금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세계는, 그 거대한 세계는 조용히, 참을성 있게 앉아서 그가 틀렸음을 증명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111p. 박살
당신 삶의 30년이 한순간에 수포로 돌아간 모습을 보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무엇이든 당신이 매일 하는 일, 무엇이든 당신이 소중히 여기는 일, 그것이 아무 의미 없다고 암시하는 모든 신호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중요한 것이기를 희망하면서 당신이 매일같이 의지를 모아 시도하는 모든 일들을 떠올려보라. 그리고 그 일에서 당신이 이뤄낸 모든 진척이 당신의 발치에서 뭉개지고 내장이 튀어나온 채 널브러져 있는 걸 발견했다고 상상해보라.
111p. 박살
그 47초 사이에 창세기가 뒤집혔다.
113p. 박살
하지만 받아들이자. 이것이 우주가 우리에게 준 것이다. 혼돈이 지배한다는 것, 나에게는 이보다 더 분명한 메시지는 없어 보였다.
118p. 박살
혼돈의 그 작은 덩굴손 하나가 데이비드의 가차 없는 끈기 덕분에 다시 질서 속으로 돌아온 것이다.
123p. 파괴되지 않는 것
나는 먼저 그가 쓴 동화부터 읽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동화가 도덕적 가르침을 가장 노골적으로 펼쳐놓는 형식일 테니까.
124p. 파괴되지 않는 것
그가 쓴 이야기들은 대부분 이런 특징을 갖고 있다. 등장인물들이 우주의 차가운 법칙을 피해갈 수 없는 폐쇄공포증적 세계를 그린다.
125p. 파괴되지 않는 것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화형을 당하기 전 브루노는 이렇게 일갈했다고 한다. "무지는 세상에서 가장 유쾌한 학문이다. 아무런 노동이나 수고 없이도 습득할 수 있으며, 정신에 우울함이 스며들지 못하게 해주니 말이다." 그리고 데이비드는 이 인용문을 독자들에게, 만약 그들이 행복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실을 차단해버린 적이 있다면 그들 역시 브루노를 살해한 자들과 다르지 않다고 경고하고 비난하는 데 사용했다.
125p. 파괴되지 않는 것
인간이 살아가는 방법은 매번 숨 쉴 때마다 자신의 무의미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거기서 자기만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말이다.
127~128p. 파괴되지 않는 것
데이비드는 나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사람에게는 동정심을 거의 느끼지 않는다. 《절망의 철학》의 최종 결론은 절망이 선택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절망이 청소년기에 자연스럽게 거쳐 가는 단계라고 생각하기는 해도 그런 감정을 떨쳐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경멸한다. 그는 그런 사람들은 "축 늘어진 정신의 유행"을 따르고, 문학 속 "슬픈 왕들"을 흉내 내는 게으른 모방자들이며, 그들이 "지옥불 같은" 숨결을 내뿜는다고 비난한다. 죽음의 냄새라는 것이다.
128p. 파괴되지 않는 것
그 모든 것의 허망함을 곱씹는 데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몹쓸 짓인 이유는, 진화가 선물한 그 소중한 전기를, 너무나 많은 경이로운 감각들을 느끼고 너무나 많은 과학적 수수께끼를 푸는 데 써야 할 그 신성한 이온들을 실존적 탐구라는 하수구로 흘려보냄으로써 글자 그대로 "몸이 아직 살아 있는데도 죽은 사람"이 되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익숙한 수치심이 나를 덮치는 것을 느꼈다.
128p. 파괴되지 않는 것
"이러한 인생관은 염세주의로 이어지는가?" 강의가 끝나갈 무렵 그는 학생들에게 일종의 마술 같은 주문을 걸었다. 혼돈이 주는 냉기를 떨쳐버리는 한 가지 방법을 말이다. 특별한 활자체로 된 여덟개의 단어.
생명에 대한 이런 시각에는 어떤 장엄함이 깃들어 있다.
129p. 파괴되지 않는 것
장엄함은 존재해. 네가 그걸 보지 못한다면 부끄러운 줄 알아.
129p. 파괴되지 않는 것
나는 모든 활동에 알코올음료를 꼭 하나씩 끼워 넣었고, 거기에 하나를 더, 또 하나를 더 끼워 넣었다. 아무 근거 없이 흡족함을 느끼는 건 아주 기분 좋은 일이었다. 나는 나의 웃음을, 내 미소를 만들어주는 샘을 되찾을 수 있었다.
130p. 파괴되지 않는 것
자신이 쓴 단어들이 다른 사람 앞에서 제대로 된 효과를 내지 못하고 철퍼덕 떨어져 내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말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생각들을 머릿속에 품고 있는 것이 얼마나 외로운 일인지를. 그리고 자기를 이해해주는 것처럼 보이는 소수의 사람들이 지닌 위험한 힘에 대해서도.
130~131p. 파괴되지 않는 것
모든 사람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그것을 카프카는 '파괴되지 않는 것'이라고 불렀어. 파괴되지 않는 것은 낙관주의와는 전혀 무관해. 낙관주의에 비하면 훨씬 더 심오하고 자의식은 훨씬 덜하지. 우리는 그 파괴되지 않는 것을 온갖 종류의 다른 상징과 희망과 야심 등으로 가리고 있어. 이런 상징과 희망과 야심은 그 밑에 무엇이 있는지 인정하라고 강요하지 않으니까. 음... 만약 그 모든 잉여를 제거한다면(혹은 제거할 수밖에 없게 된다면), 파괴되지 않는 그것을 찾게 될 거야. 그리고 우리가 일단 그것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면(카프카는 여기서 더 깊게 들어가. 그는 우리가 파괴되지 않는 것을 낙관적이거나 긍정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해주지 않아), 그것은 실제로 우리를 찢어발기고 파괴할 수도 있어.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거지....
131p. 파괴되지 않는 것
파괴되지 않는 것은 바보들이 겪는 고통처럼 보였다. 바보들, 낭만주의자들, 슬픈 왕들을 사랑하는 흉내쟁이들, 내면의 열정이라는 연료가 너무 강력하게 피어올라 현실감각이 안개처럼 흐려진 사람들.
133p. 파괴되지 않는 것
사람의 내면에 있는 것은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보다 더 위대하다.
137p. 기만에 대하여
생각해보니, 자기기만이라는 게 과연 그렇게 나쁜 일인가 하는 궁금증도 생겼다.
138~139p. 기만에 대하여
실제로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은 자신을 실제보다 더 매력적이고, 남들을 더 잘 도우며, 더 지적이고, (주사위를 던지거나 복권 번호를 뽑는 것 같은) 우연한 사건들을 가능한 정도보다 훨씬 더 잘 통제하는 사람으로 평가한다는 것이 꾸준히 확인됐다. 그 사람들은 과거를 돌아볼 때도 자기가 실패한 것보다 성공한 것들을 훨씬 더 쉽게 기억해냈다. 미래를 내다볼 때는 친구들이나 급우들보다 자신이 성공할 가능성을 훨씬 더 크게 잡았다.
140p. 기만에 대하여
순한 거짓말, 하얀 거짓말, 작은 장미봉오리 같은 거짓말은 무척 이로운 효과를 낼 수 있다. 요컨대 힘들어하는 어떤 사람을 붙잡고 그 사람이 자신에 관해 품고 있는 이야기를 약간 더 긍정적인 이야기⎯그가 실제보다 조금 더 강한 사람, 실제보다 더 친절한 사람으로 그려지는 이야기, 연인과의 이별에서 자신의 잘못이 겉보기만큼 그렇게 크지 않게 보이는 이야기⎯로 이끌어갈 수 있다면, 그 사람의 인생에 심오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140p. 기만에 대하여
버지니아대학의 심리학자 팀 윌슨Tim Wilson은 이야기를 살짝 조정하는 것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을 수 있다는 점에 감명 받아 그중 가장 극적인 결과들을 모아 《방향 바꾸기Redirect》라는 책을 펴냈다. "스토리 에디팅"을 받은 대학생들은 더 높은 학점을 받고, 중퇴하는 비율이 줄었으며, 심지어 여러 해 뒤에는 건강이 더 좋아졌다. 직장인들은 출근하는 비율이 더 높아졌다. 또 정신적 충격을 입은 사람들에게 자신에게 벌어진 그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수정하도록 가르치자 평온한 감정을 회복하는 시간이 더 빨라졌다.
141p. 기만에 대하여
어쩌면 진화가 우리에게 준 가장 위대한 선물은 "우리는 실제보다 더 큰 힘을 지니고 있다"는 믿음을 품을 수 있는 능력인지도 모른다.
141~142p. 기만에 대하여
심리학자들은 인간으로 산다는 건 가혹한 운명이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우리는 세상이 기본적으로 냉담한 곳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성공은 보장되지 않고, 수십만 명을 상대로 경쟁해야 하며, 자연 앞에서 무방비 상태이고, 우리가 사랑한 모든 것이 결국에는 파괴될 것임을 알면서도 이렇게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작은 거짓말 하나가 그 날카로운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낼 수도 있고, 인생의 시련 속에서 계속 밀고 나아가도록 도와줄 수도 있으며, 그 시련 속에서 가끔 우리는 우연한 승리를 거두기도 한다.
142p. 기만에 대하여
그릿. 끈질김을 뜻하지만 그보다 귀에 착 붙는 단어, 그릿. "긍정적 피드백"이 없는데도 "매우 장기적인 목표"에 로봇처럼 뛰어들게 해주는 것, 그릿. 머리로 벽을 반복적으로 들이받을 수 있는 능력.
144~145p. 기만에 대하여
그의 생애를 들여다보면 벌어지는 불행을 실시간으로 막아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는 디즈니의 룸펠슈틸츠헨 캐릭터와 좀 비슷하다. 어떤 거부나 모욕이나 실패도 받아들여 그것을 마치 마법처럼 칭찬으로 바꿀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회고록의 한 부분에서 그는 여러 실패를 아무렇지 않게 칭찬의 꽃다발로 바꿔놓는 재주를 선보인다.
대학 때 그는 식물학 분야에서 어떤 상의 수상 후보로 올랐다가 탈락했는데, 그의 설명에 따르면 자신의 사고가 표준화된 시험이 포착하기에는 너무 광범위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곤충학 분야에서 상을 받지 못한 이유는 자기가 너무 아량이 넓어서였으며(더 가난한 학생이 상금을 받을 수 있도록 "물러섰다"는 것이다), 프랑스사에서 상을 받지 못한 것은 자기가 너무 윤리적이기 때문(상의 규칙이 "불공정"하다고 판단해 스스로 시도할 기회를 박탈했단다)이라고 했다. (...)
데이비드가 잠재적으로 자기 인격에 가해질 공격을 능수능란하게 막아내는 걸 보면 참으로 놀랍다.
146p. 기만에 대하여
기만의 기이한 연금술이 바로 눈앞에서 펼쳐졌다. 작은 거짓말들이 동으로, 은으로, 금으로 변했다. 겸손을 유지하라는 수천 년 이어져온 경고는 잊어라. 어쩌면 이것이 신이 없는 세계의 시스템이 작동하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지속적으로 오만을 복용하는 것이야말로 실패할 운명을 극복하는 최선의 방법임을 보여주는 증거인지도 모른다.
146p. 기만에 대하여
"모든 시대에는 그 시대가 가져 마땅한 미치광이들이 생겨난다." 영국의 역사가 로이 포터Roy Porter가 언젠가 쓴 말이다.
147~148p. 기만에 대하여
"자기고양self-enhancement"에 관한 수백 건의 연구를 메타 분석한 마이클 더프너Michael Dufner는 과도한 자신감을 보이는 사람들의 자기과시가 다른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지만 정작 자신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결국 공동체 안에서 좋은 평판을 받을 때 얻을 수 있는 혜택을 놓치기도 한다는 걸 발견했다. (...)
사회적인 측면에서만 손해를 보는 게 아니다. 자기기만의 두꺼운 거품벽 안에 있으면 고통이 서서히 축적될 수 있다. (...) 로빈스와 비어는 그들이 스스로 실망을 자초하는 것이라고, 즉 "단기적으로 혜택을 얻는 대신 장기적으로 비용을 치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서 기만은 나중에라도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이다. 장밋빛 렌즈의 힘에는 한계가 수반된다. 그리고 그 힘이 떨어지면 자신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정말로 따끔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150p. 기만에 대하여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아주 편안하게 받아들이며, 비판을 받아도 자기 가치가 위협받는다고 느끼지 않으므로 높은 자존감은 당사자를 기이할 정도로 평화롭게(그들의 표현으로는 "이례적으로 비공격적으로") 만들 수도 있다고 했다. 그들은 자존감이 높기는 하지만 자존감에 대한 위협을 쉽게 느끼는 극히 소수의 사람만이 위험한 이들이라고 생각했다.
바우마이스터와 부시먼은 이렇게 썼다. "쉽게 말해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자신을 우월한 존재라고 보는 사람들이라기보다 자신을 우월한 존재로 보고 싶다는 욕망이 강한 사람들이다. (...) 거창한 자기상을 확인받는 일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비판당하는 것을 몹시 괴로워하며 자기를 비판한 사람을 사납게 공격하는 것으로 보인다."
158p. 세상에서 가장 쓴 것
막막한 공포에 사로잡힌 제인은 자기 바로 위 또는 자기 내부 어딘가에 있는 무언가를 응시하며, 이가 없는 잇몸으로 애원했다. "오, 하느님. 저의 죄를 용서해주세요."
168p. 세상에서 가장 쓴 것
그 책이 그렇게 얇은 것은 로버트 커틀러가 미래에 주는 선물, 헛소리를 걸러내고 진실만을 담고자 한 그의 노력의 결과다.
173p. 세상에서 가장 쓴 것
나는 데이비드가 엄지손가락으로 그 카드를 단단히 붙잡고 내용을 읽는 모습을 그려보다가, 작은 혐오감의 전율을 느꼈다.
174p. 세상에서 가장 쓴 것
데이비드가 한 일이라고 의심하고 있는 바로 그 일을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니까 자신의 세계관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자신감은 부패를 불러온다는 내 아버지의 믿음을 확인하기 위해 사실들을 왜곡하는 일을?
174p. 세상에서 가장 쓴 것
데이비드에 대한 의심이 점점 커져가고 있음에도 나는 그의 좋은 면을 발견하도록, 그 좋은 면에 귀를 기울이도록 나 자신에게 강요했다.
175p. 세상에서 가장 쓴 것
나는 제시가 데이비드를 자기 인생의 "기적"이라고 쓴 회상의 글을 조심스레 읽었다. 그가 쓴 여러 편의 시들, 해면동물과 불가사리와 심지어 풀까지 이 세계의 숨어 있는 보잘것없는 것들에 부치는 송시들을. 또 그가 남획으로 죽어가는 물개를 보호하기 위해 지치지 않고 펼친 노력에 관해 읽었다. 그가 말년에 열정적으로 평화를 옹호한 일로 받은 무거운 메달들을 들어보았다. (...) 나는 그가 노예제도 폐지론자였던 젊은 시절, 가슴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작은 가죽 장정 일기장의 냄새를 맡았다. 녹인 버터 냄새가 났다. 거기서 애벌레들과 거미, 나뭇잎을 그린 그림들이 쏟아져나왔다.
175p. 세상에서 가장 쓴 것
나는 빈손으로 집에 돌아왔다. 언제나처럼 길을 잃은 채로.
179~180p. 진정한 공포의 공간
아오스타는 정신적・육체적 장애를 지닌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안식처 같은 도시였다. 수세기에 걸쳐 가톨릭교회는 장애 때문에 가족에게 거부당한 사람들을 아오스타로 불러들여 주거와 음식을 제공하고 돌보아왔다. 그들 중 많은 수가 결국에는 밭이나 부엌의 능숙한 일꾼들이 되었고, 그중 많은 이들이 사랑에 빠지고 결혼하고 자녀를 낳았다. 그 결과 일종의 거꾸로 뒤집힌 마을이 만들어졌다. 비정상적인 것이 정상인 곳, 사회에서 무능력자 취급을 받던 사람들이 지원을 받아 번성하는 곳으로 말이다.
누군가는 이 마을에서 어떤 아름다움을,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사람들이 존엄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도와주는 근본적으로 인간적인 방식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1880년대에 이곳을 방문한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그곳을 "거위보다 지능이 낮고 돼지보다 품위가 떨어지는", "피조물들"이 들끓는 "진정한 공포의 공간"으로 묘사했다.
182p. 진정한 공포의 공간
심지어 《캔트세이웨어 우생학 칼리지The Eugenic College of Kantsaywhere》라는 SF 소설까지 썼다. 엄격한 테스트를 통과한 사람들만 자식을 낳을 수 있도록 허가하고, 그 밖의 사람들이 자식을 가지려고 시도하면 투옥하고 "가차 없고 엄격하게" 처벌하는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였다. 골턴은 이 소설이 행복한 이야기이자, 인류를 쇠퇴에서 구하는 안내서라고 여겼다.
183p. 진정한 공포의 공간
부적합자! 단박에 귀를 사로잡으며 매우 암시적이고 너무나 깔끔한 단어. 그것은 어떤 사람들이 살 자격이 있는가에 관한 그의 의견에 과학의 망토를 둘러줄 수 있는 단어였다. 부적합자! 그냥 한 남자의 판단이 아니라, 자연에 존재하는 현실 자체.
순회 연설을 다닐 때면 데이비드는 교회와 빈민구호소에 꼭 들러서 헌신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노력이 "부적합자 생존"이라는 위험을 유발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188~189p. 진정한 공포의 공간
"인간은 눈에 보이는 외부 형질에만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 자연은 외양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 자연은 모든 내부 기관과 모든 미세한 체질적 차이에, 생명의 전체 조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191p. 진정한 공포의 공간
가난이나 범죄성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것은 소용돌이처럼 복잡하고 은밀하게 작용하는 환경 요인들 때문이라는 것이 지금은 확고히 규명된 상태다.
201p. 사다리
오싹했다. 그 잔인성과 무자비함이. 그 추락의 무지막지한 깊이와 그 파괴적 광란의 크기가. 토할 것 같았다. 내가 모델로 삼으려 했던 자는 결국 이런 악당이었던 것이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생각에 대한 확신이 너무나 강한 나머지, 이성도 무시하고 도덕도 무시하고, 자기 방식이 지닌 오류를 직시하라고 호소하는 수천 명의 아우성⎯나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인가니요⎯도 무시해버린 남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숨어 있는 보잘것없는" 것들에 몰두하고 관심을 기울이던 그 상냥했던 소년이, 어떻게 바로 그 숨어 있는 보잘것없는 존재들을 기꺼이 말살하려는 남자가 된 것일까? 그의 이야기 중 어느 지점에서 변한 것일까? 그리고 왜?
202p. 사다리
데이비드는 공개적으로는 자기기만을 그토록 공격했지만 사적으로는, 특히 시련의 시기에는 더욱더 자기기만에 의존했던 듯하다. 운명의 형태를 만드는 것은 사람의 의지다. "긍정적 착각은 견제하지 않고 내버려둘 경우 그 착각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이든 공격할 수 있는 사악한 힘으로 변질될 수 있다"고 경고한 그 심리학자들의 말이 옳았던 것 같다.
202p. 사다리
과도한 확신, 그릿, 자부심이 섞이면 위험한 혼합물이 만들어지는 것은 분명하지만,
205p. 사다리
동물은 인간이 스스로 우월하다고 가정하는 거의 모든 기준에서 인간보다 더 우수할 수 있다. 까마귀는 우리보다 기억력이 좋고, 침팬지는 우리보다 패턴 인식 능력이 뛰어나며, 개미는 부상당한 동료를 구출하고, 주혈흡충은 우리보다 일부일처제 비율이 더 높다. 지구에 사는 모든 생물을 실제로 검토해볼 때, 인간을 꼭대기에 두는 단 하나의 계층구조를 그려내기 위해서는 상당히 무리해서 곡예를 해야 한다.
206p. 사다리
이것이 바로 다윈이 독자들에게 알려주려고 그토록 노력했던 점이다. 사다리는 없다.
206~207p. 사다리
처음 다윈을 읽을 때부터 마지막으로 우생학을 밀어붙일 때까지 어느 시점에서든 그 믿음을 놓아버리는 것은 다시 현기증을 불러들이는 일이었을 것이다. 방금 자신의 형을 앗아간 세상 앞에서 상실감에 가득 차 떨고 있던 어린 소년으로 되돌아가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세상 앞에서, 그 세상을 전혀 이해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겁에 질린 무력한 아이로.
207p. 사다리
그것은 지독히도 방향 감각을 앗아가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혼돈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똑바로 바라보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써왔던 바로 그 세계관이었을 것이다.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없이, 개미들과 별들과 함께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떨어져 내리는 느낌. 소용돌이치는 혼돈의 내부에서 바라본, 차마 마주 볼 수 없을 만큼 눈부시고 가차 없고 뚜렷한 진실. 너는 중요하지 않아라는 진실을 흘낏 엿본 바로 그 느낌일 것이다.
207p. 사다리
그런 관점에서 보면 나는 그가 자연의 질서라는 비전을 그토록 단단하게 붙잡고 늘어졌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도덕과 이성과 진실에 맞서면서까지 그가 그렇게 맹렬하게 그 비전을 수호한 이유를. 바로 그 때문에 그를 경멸했음에도 어느 차원에서는 나 역시 그가 갈망한 것과 똑같은 것을 갈망했다.
208p. 사다리
혼돈을 이길 방법은 없고, 결국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거라고 보장해주는 안내자도, 지름길도, 마법의 주문 따위도 없다.
213p. 민들레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가 이 나라의 정체성을 정의할 때 우리가 반대하는 것이라 간주하는 그 사고방식, 우리가 초등학생에게 나치, 다른 사람들, 나쁜 놈들에게서 시작되었다고 가르치는 바로 그 악행, 그것을 세계 최초로 국가 정책으로 삼은 나라가 바로 우리였다.
220p. 민들레
자신에게서 자유와 유년기, 아이를 갖겠다는 꿈까지 너무나 많은 것을 앗아간 관념들을 전파한 데이비드 스타 조던 같은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애나는 화가 난다고 말했다. 그러나 애나는 분노에 초점을 맞추지 않으려고, 흉터를 쳐다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살고 있다.
221p. 민들레
이 거실은 살아 있다.
221p. 민들레
또한 그는 나 역시 부적합하다고 판단했을것이다. (...) 숨에서 유황을 내뿜는 인생의 낭비자.
222p. 민들레
우리는 중요하지 않다. 이것이 우주의 냉엄한 진실이다. 우리는 작은 티끌들, 깜빡거리듯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우주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존재들이다.
222p. 민들레
명민하고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호흡, 모든 걸음마다 우리의 사소함을 인정해야 한다.
222p. 민들레
아, 그것은 엉킨 실타래였다.
제 꼬리를 먹는 우로보로스.
복수를 하겠다고 나무로 기어 올라갔지만 높이 뜬 독수리라는 진실에 얻어맞아 나가떨어진 파란 꼬리의 스킹크.
나는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심정이었다.
224p. 민들레
메리가 수용소에서 자신을 보호해준 애나에게 영원히 은혜를 갚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보답하는 그 행위에서 진짜 의미를 발견했다는 것을.
226p. 민들레
천천히 그것이 초점 속으로 들어왔다. 서로서로 가라앉지 않도록 띄워주는 이 사람들의 작은 그물망이, 이 모든 작은 주고받음⎯다정하게 흔들어주는 손, 연필로 그린 스케치, 나일론 실에 꿴 플라스틱 구슬들⎯이 밖에서 보는 사람들에게는 그리 대단치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그물망이 받쳐주는 사람들에게는 어떨까? 그들에게 그것은 모든 것일 수 있고, 그들을 지구라는 이 행성에 단단히 붙잡아두는 힘 자체일 수도 있다.
226p. 민들레
바로 이런 점들이 내가 우생학자들에 대해 그토록 격노하는 이유다. 그들은 이런 그물망의 가능성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그들은 애나와 메리 같은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사회를 풍요롭게 만들 수 있고, 자신들이 받은 빛을 더욱 환하게 반사할 수 있는 이 실질적인 방식들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메리는 애나가 없었다면 수용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래, 이런 것. 이는 정말 대단한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죽는 것과 사는 것의 차이. 그게 아무 가치가 없다고?
226p. 민들레
바로 그때 그 깨달음이 내 머리를 때렸다. 그게 거짓말이 아니라는 깨달음. 애나가 중요하다는, 메리가 중요하다는 말. (...) 그 말은 거짓말이 아니라, 자연을 더욱 정확하게 바라보는 방식이다. 그것이 민들레 법칙이다!
228p. 민들레
인간이라는 존재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이 지구에게, 이 사회에게, 서로에게 중요하다.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질척거리는 변명도, 죄도 아니다. 그것은 다윈의 신념이었다! 반대로, 우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만 하고 그 주장만 고수하는 것이야말로 거짓이다. 그건 너무 음울하고 너무 경직되어 있고 너무 근시안적이다. 가장 심한 비난의 말로 표현하자면, 비과학적이다.
231p. 데우스 엑스 마키나
지구가 태양을 마주 보려 천천히 고개를 돌리고 있을 무렵이니, 그가 마지막으로 본 장면은 아마도 그의 첫 번째 사랑, 어스름한 새벽하늘에 남아 있는 별들이었을 수도 있겠다.
233p. 데우스 엑스 마키나
다시 말해서 그는 자신의 우생학적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평화주의자가 된 것이다.
235p. 데우스 엑스 마키나
이 세상은 우주적 정의의 감각 같은 건 그 까칠하고 무의미한 조직 속 어디에도 새겨져 있지 않을 만큼 야멸차기 때문이다.
235p. 데우스 엑스 마키나
이것이 끝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바닥 모를 혼란한 세계는 소매 속에 또 하나의 속임수를 감춰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데이비드의 질서를 파괴하고, 그에게 가장 소중한 그것을 훔쳐 갈 마지막 하나 남은 방법을. 이 세계가 마침내 그의 물고기 컬렉션을 단박에 허물어뜨린 그 은근하고 음흉한 방식을. (...) 아니, 자연의 방법은 훨씬 더 잔인했다. 자연은 그가 자기 손으로 직접 그 일을 하도록 만들었다.
235p. 데우스 엑스 마키나
1980년대에 분류학자들이 타당한 생물 범주로서 "어류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조류는 존재한다.
포유류도 존재한다.
양서류도 존재한다.
그러나 꼭 꼬집어, 어류는 존재하지 않는다.
238p. 데우스 엑스 마키나
모델에 추가된 참신한 업그레이드가 무엇인지 알아낼 수 있다면, 그 새로운 특징을 따라 생물들이 거쳐 간 다양한 버전들을 추적할 수 있고, 시간의 화살이 어느 길을 가리키고 있는지(좀 더 자신 있게) 추측할 수 있고, 더 큰 확신을 갖고 누가 누구를 낳았는지 단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발견은 단순했고, 미묘했고, 특출났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아주 놀라운 관계들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박쥐는 날개가 달린 설치류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낙타와 훨씬 더 가깝고, 고래는 실제로 유제류(발굽이 있는 동물로, 사슴이 속한 과)라는 사실이 그렇다.
238p. 데우스 엑스 마키나
그들은 직관이 가려버린 사실들 가운데 가장 어안이 벙벙한 예들을 제시했다. 새들이 공룡이라는 사실. 버섯은 식물처럼 느껴지기는 하지만 사실은 동물과 훨씬 가깝다는 사실.
241p. 데우스 엑스 마키나
육기어류肉鰭魚類, Sarcopterygii⎯폐어와 실러캔스coelacanth⎯는 우리와 상당히 가까우며,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의 진화적 사촌, 허파가 위에 있고 꼬리가 저 아래 있는 인어라고 할 수 있다.
241~242p. 데우스 엑스 마키나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게으름에 대한 경고의 예로 자주 지적하던, 고착생활을 하는 멍게(피낭동물)가 있다. 멍게는 엄밀히 말해(어쨌든 오늘날 분류학자들에 따르면) 척추동물은 아니지만, 척삭이라는 척추와 비슷한 구조물을 가장 먼저 선구적으로 갖춘 생물 중 하나다. 다시 말해 멍게는 퇴보한 존재가 아니라 정반대로 혁신가였던 셈이다.
"어류"라는 범주가 이 모든 차이를 가리고 있다. 많은 미묘한 차이들을 덮어버리고, 지능을 깎아내린다. 그 범주는 가까운 사촌들을 우리에게서 멀리 떼어놓음으로써 잘못된 거리 감각을 만들어내는데, 이는 상상 속 사다리에서 우리가 차지하는 제일 윗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242p. 데우스 엑스 마키나
어류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류"라는 범주는 존재하지 않는다.
데이비드에게 너무나도 소중했던 그 생물의 범주, 그가 역경의 시간이 닥쳐올 때마다 의지했던 범주, 그가 명료히 보기 위해 평생을 바쳤던 그 범주는 결코, 단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
245p. 데우스 엑스 마키나
윤의 고통이, 윤이 물고기를 잃은 "잔인한" 경험이 나에게는 무척 소중했다. 내가 윤을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대리인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245p. 데우스 엑스 마키나 - 보충 설명란
이걸 읽는 보상으로 당신은 자연계의 질서가 어쩌면 우리 내부에 장착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괴상한 사실을 배우게 될 것이다.
245p. 데우스 엑스 마키나 - 보충 설명란
질서를 만들어내는 일종의 메커니즘이 우리 내부에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러니까 우리가 자연을 분류하는 방법에 관한 매우 구체적인 믿음 체계를 획득할 수 있는 성향을 지니고 태어난다는 것을 암시한다. 누가 한 부류에 속하고, 누가 서로 다른 부류에 속하며, 누가 제일 윗자리를 차지하는지 등을 판단하는 분류법을 말이다.
246p. 데우스 엑스 마키나
그의 아픔을, 어느 정도는 고뇌를 느낄 그를 상상해보는 일... 그것은 나에게 경이로운 효과를 발휘했다. 그 상상은 무신론자에게는 가장 금기시되는 판타지로 내 피부를 콕콕 찔러댔다. 어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 밖, 혼돈의 차가운 수학 속에 결국 일종의 우주적 정의가 존재한다는 판타지 말이다.
247~248p. 데우스 엑스 마키나
헤더는 하고많은 사람 중에 코페르니쿠스를 예로 들었다. 그 시대 사람들이 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면서 움직이고 있는 게 별이 아니라는 걸 받아들이기가 얼마나 어려웠을지 이야기했다. 그럼에도 그에 관해 이야기하고, 그에 관해 생각하고, 별들이 매일 밤 그들 머리 위에서 빙빙 돌고 있는 천구의 천장이라는 생각을 사람들이 서서히 놓아버릴 수 있도록 수고스럽게 복잡한 사고를 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별들을 포기하면 우주를 얻게 되니까"라고 헤더는 말했다.
249p. 데우스 엑스 마키나
그 새로운 비전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너무 적었고, 아무리 노력해도 사람들의 확신을 조금이라도 무너뜨리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건, 음, 30년 동안 계속해온 전투였어요." 그가 한숨을 쉬었다.
250p. 데우스 엑스 마키나
애나는 그것이 "부적합"이라는 단어와 비슷한 게 아니냐고 물었다. 애나의 등짝에 찰싹 붙어 있는 단어. (...) 나는 그렇다고, 그것과 아주 비슷하다고 대답했다. 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물고기에 대해 연민이 느껴진다고 했다. 일단 무언가에 이름을 붙이고 나면 더 이상 그걸 제대로 바라보지 않게 된다는 사실에 대한 연민이었다.
251p. 데우스 엑스 마키나
그 "어류"라는 말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경멸적인 단어다. 우리가 그 복잡성을 감추기 위해, 계속 속 편히 살기 위해, 우리가 실제보다 그들과 훨씬 더 멀다고 느끼기 위해 사용하는 단어다.
252p. 데우스 엑스 마키나
나의 아버지는 "어류"라는 단어를 포기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 단어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이다. 과학적으로 정확하지 않다는 건 이해하지만 유용한 단어라고 생각했다. 그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세계를 경험하는 제한된 방식에 자신을 가두게 되는 것이 걱정되지 않느냐고 내가 묻자, 아버지는 불만스럽게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이고, 나는 그게 뭐든, 아직 내가 해방되지 않은 것으로부터 해방되기에는 너무 늙었어."
252p. 데우스 엑스 마키나
큰언니는 물고기를 놓아버리는 데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언니는 어류라는 범주 전체를 바로 손에서 놓아버렸다. 왜 언니한테는 그게 그렇게 쉬운 거냐고 묻자 이렇게 말했다. "왜냐하면 그게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인간은 원래 곧잘 틀리잖아." (...) "성장한다는 건,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말을 더 이상 믿지 않는 법을 배우는 거야."
정말로 이 물음은 모든 사람마다 다 다르다.
256~257p. 에필로그
* 새: 명백히 열등한 존재지만, 곡예 솜씨가 감탄스러움.
* 잠자리: 멀리 떨어져 있는 영혼, 거의 동물 같지 않음(날개가 달린 잔가지).
* 나무: 식물 중 가장 강한 존재.
* 버섯: 나무의 변형된 동생.
258p. 에필로그
그건 어쩐지 환원하는 동시에 비난하는 말처럼 느껴졌다.
260p. 에필로그
우리만의 사적인 아틀란티스.
261p. 에필로그
물고기들은 내가 그때까지 본 무엇과도 달랐다.
노란 앵무새들과 검은 천사들과 아콰마린색 달의 조각들. 상당한 크기의 자주색 물고기 하나는 내가 강아지처럼 자기를 졸졸 따라다니게 해줬다. 나는 벅찬 감동을 느꼈지만, 감동의 소리를 낼 수 없었다. 그 감동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물 위로 올라가야 했다. 나는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거기 그들이 있었다. 내가 그렇게 수없이 글로만 읽었던 존재들. 아직 내가 이름도 모르는 존재들.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그들의 피부 아래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나와 훨씬 더 비슷한 내장기관이 있다는 것, 나와 똑같은 이온이 흐르고 있는 뇌가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어류가 아니라는 것. 은빛 존재들 한 떼가 나를 향해 몰려오더니 잘하면 잡을 수도 있는 기차처럼 내 아래쪽에서 빠른 속도로 몰려다녔다. 나는 그 은빛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들은 갈라지며 나를 자기들 안으로 받아주었다. 수백 마리의 은빛 영혼들이 나를 감쌌다.
262p. 에필로그
이건 내가 그려왔던 인생이 아니었다. 체격이 아주 작고, 나보다 일곱 살이 어리며, 자전거 경주에서 나를 이기고, 툭하면 라를 향해 어이없다는 듯 눈동자를 굴리는 여자를 쫓아다니는 것은. 그러나 이건 내가 원하는 인생이다. 나는 범주를 부수고 나왔다. 자연이 프린트된 커튼 뒤를 들춰보았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무한한 가능성의 장소를 보았다. 모든 범주는 상상의 산물이다. 그건 세상에서 가장 근사한 느낌이었다.
263p. 에필로그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이 세계에 관해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은 또 뭐가 있을까? 우리가 자연 위에 그은 선들 너머에 또 어떤 진실이 기다리고 있을까? 또 어떤 범주들이 무너질 참일까? 구름도 생명이 있는 존재일 수 있을까? 누가 알겠는가. 해왕성에서는 다이아몬드가 비로 내린다는데 그건 정말이다. 바로 몇 년 전에 과학자들이 그 사실을 알아냈다. 우리가 세상을 더 오래 검토할수록 세상은 더 이상한 곳으로 밝혀질 것이다.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은 사람 안에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잡초 안에 약이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얕잡아봤던 사람 속에 구원이 있을지도 모른다.
264p. 에필로그
늘 거기 있었지만 어째선지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이 놓치고 있었던 것. 그러면 세계는 조금 더 벌어지며 열린다.
265~266p. 에필로그
나는 언니와 아버지가 그들만의 좀 이상한 방식이지만 가까운 사이가 될 거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막대빵에 대한 사랑을 공유하며 단둘이서만 제일 좋아하는 이탈리아 식당에 다니게 되리라는 것도. 때때로 언니가 아주 짧게 아버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모습을 보게 되고, 그 한순간 모든 행성의 무게가 사라져버리게 되리라는 것도.
268p. 에필로그
이 사다리, 그것은 아직도 살아 있다.
이 사다리, 그것은 위험한 허구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은 그 허구를 쪼개버릴 물고기 모양의 대형 망치다.
272p. 감사의 말
당신들은 줄곧 내 마음속의 소리 없는 천사들이었고, 응원과 유머와 격려의 파괴되지 않는 원천이었답니다. 거기 있어줘서 고마워요.
273p. 감사의 말
내게 처음으로 작은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가르쳐준 나의 어머니, 로빈 퓨어 밀러에게 감사합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내가 가장 어두운 날을 통과하는 동안 나를 붙잡아준 밧줄이었어요.
273p. 감사의 말
내게 처음으로 확실성을 조심해야 한다고 가르쳐준 작은언니 알렉사 로즈 밀러에게 감사합니다. 지난 20년 동안 언니는 의료계 전문가들에게 불확실성을 포용하는 방법과, 그렇게 하는 것이 왜 생명을 구하는 일인지 가르쳐왔습니다. 언니의 너무나 훌륭하고 도발적인 작업은 나의 사고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습니다.
273p. 감사의 말
나에게 강해지는 법에 관해 지구상 그 누구보다 많이 가르쳐 준 나의 큰언니 애비게일. 이 책에서 언니 삶의 일부를 이야기할 수 있게 해주고, 그렇게 맹렬히 나를 사랑해주고, 나를 그렇게 격하게 웃게 만들어준 것에 감사합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얻어 꼭 써보고픈 표현과 단어
* 동정(同定) : identification이란 생물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한 작업으로, 해당 생물 또는 표본이 속한 분류군과 정확한 이름을 알아내는 일이다.
* 병폐 : 병통(깊이 뿌리박힌 잘못이나 결점)과 폐단(어떤 일이나 행동에서 나타나는 옳지 못한 경향이나 해로운 현상)을 아울러 이르는 말.
* 서한문 : 편지에 쓰는 특수한 형식의 문체. 상대편에게는 경어(敬語)를 쓰고, 자신은 겸양(겸손한 태도로 남에게 양보하거나 사양함.)의 말을 쓰는 것이 특징이다.
* 일갈 : 한 번 큰 소리로 꾸짖음. 또는 그런 말.
* 쇄도 : (1)전화, 주문 따위가 한꺼번에 세차게 몰려듦. (2)어떤 곳을 향하여 세차게 달려듦.
* 땅뙈기 : 얼마 안 되는 자그마한 땅. 주로 논밭을 가리킨다.
* 그릿(Grit) : 끈질긴 투지
* 횡행하다 : (1)모로 가다. (2)아무 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행동하다.
* 예속 : 남의 지배나 지휘 아래 매임.
* 고갱이 : 풀이나 나무의 줄기 한가운데에 있는 연한 심.
* 송시 : 공덕을 기리는 시. 서정적 시가 문학의 한 형태이다.
* 회한 : 뉘우치고 한탄함.
* 논거 : 어떤 이론이나 논리, 논설 따위의 근거.
* 연무 : 연기와 안개를 아울러 이르는 말.
* 환원 : 본디의 상태로 다시 돌아감. 또는 그렇게 되게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