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정혜윤> 슬픈 세상의 기쁜 말 中, 나를 살아 있게 하는 말은 무엇인가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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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p.

아니면 서로 어디에도 가닿지 못하는 파편 같은 말을 하게 될까?


18p.

무엇인가가 좋다는 것을 알아도 그것이 왜 좋은지 표현할 수 있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19p.

"내가 오늘 하는 말 중 먼 미래에도 살아남기를 원하는 말이 있는가?"

나의 하루가 공허하다고 느낄 때, 나 자신이 하루 24시간이 낳은 파편 더미에 불과하다고 느낄 때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32p.

바다는 우리 인간이 다른 종에 대해 생각하기 좋은 곳이다. 인간사 먹고사는 문제는 다른 종에게 신세 지지 않는 것이 없다.


46p.

어부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와 같은 말이었다. 삶과 죽음, 그 사이에 펼쳐진 것은 고통과 사랑의 이야기다.


56p.

난 이 세상이 어떻게 이 세상이 되었는지 궁금해. 세계 모든 나라에 대해 알고 싶고, 세계 모든 나라의 언어를 들어보고 싶고, 우리나라 각 도는 어떻게 각 도가 되었고, 거기에 뭐가 있는지 알고 싶고, 각 도에서 사람들은 뭐 하고 사는지 그 사람들은 어떤 고통을 겪고 무슨 말을 하고 사는지 알고 싶어. (...) 내가 이제 살면 얼마나 더 살겠어. 한 2~3년 남았을까? 내가 지금 듣는 것은 다시는 못 듣겠지. 다시는 이야기도 못 나누겠지. 그런 걸 생각하면 아주 열성적으로 듣게 돼. 귀가 배지근해지지.


58p.

그러나 지금, 말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사라지는지도 모르게 사라져가는 중이다. 다른 모든 좋은 것들처럼. 한 방에 날려버리고 말겠어, 라는 의도를 가진 말들이 넘쳐난다. 나는 말 뒤에서 독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을 무력하게 바라보고만 있다.


69p.

빠삐용이라는 별명은 아들이 하도 도망을 잘 다녀서 붙여진 것이다. 아들은 늘 탈출을 꿈꾼다. 어디로부터의 탈출? 문제는 그걸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다. 그러나 인생에 무엇인가로부터의 탈출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도 있던가?


96~97p.

'세월이 가면 슬픔은 사그라든다고?' 아니었다. 슬픔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슬픔은 사라지는 단어가 아니다. 슬픔은 오겠다는 기별도 없이 제멋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수시로 온다. 눈을 감아도 온다. 슬픔이 오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눈꺼풀은 없다. 슬픔은 거친 밤을 기진맥진 통과하게 만든다. 슬픔은 자신을 진지하게 대하라 요구하는 손님이다.


97~98p.

재난참사로 가족을 잃는다는 것은 인간이 맨정신으로 겪을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유족들은 "당신도 겪어보세요"가 아니라 "당신은 겪지 마세요"라고 말한다. 이것이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의 의미다. 엄청난 자제심의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리를 바꿔볼 줄 알아야 한다. '내가 그 일을 겪었다면....'


99p.

덕분에 슬픈 사람들은 가장 인간적인 단어 아래 모일 수 있었다. '연대'라는 단어였다. 슬픈 사람들은 그 단어 아래 모여, 그 단어를 임시 피난처 삼아, 다시 인간들 틈에서 짧은 위안을 구하고 어두운 마음을 헤집어 해야 할 말을 찾아냈다. 내가 프랑스에서 들은 연대의 정의는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인간의 마음에 속한다.

연대   원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겪을 수밖에 없었던 일로 알게 된 모든 것을 당신께 알려드릴께요. 온 힘을 다해 당신을 도울게요. 당신은 나보다 덜 슬프도록요.


100p.

그는 다른 사람의 슬픔이 이슬 맺힌 새벽 꽃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심조심 다뤘다. 나무 테이블은 점점 더 세상의 슬픈 사람들을 위한 피난처가 되었다. 그 자리에서 가장 슬픈 사람인 그가 슬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가장 슬픈 사람인 그가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했다. 그런데 슬픔에 위계질서가 있는가? 그는 자신에게 물어봤다. 아마 아닐 것이다. 각자의 슬픔의 크기는 저마다 우주만큼 광활하다.


101p.

그는 모자에 자신의 이름 이니셜을 오렌지색 실로 수놓았다. 글씨체는 필기체였다. H, M, A, 알파벳 세 글자가 떨어져 있지 않고 부드럽게 연결되어 있었다. 마치 글자들이 서로에게 손을 내밀고 있는 것처럼.


102p.

다윈. 그는 휴식을 취하기 위해 소설을 읽곤 했으리라. 하지만 조건이 있었다: 절대 슬픈 결말은 안 된다는 것. 어쩌다 그런 책을 읽게 되면, 분노에 휩싸여 불 속에 던져버리곤 했다. (...) 그는 죽어가는 종(種)들을 원 없이 관찰했다. 약자를 짓밟는 강자의 승리를,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수많은 시도를, 빠르든, 늦든 결국 최후를 맞는 건 마찬가지인데. 어쨌든 그는 아주 미세한 규모의 허구로 행복한 결말을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을 획득했다.

그러므로 필수적이다: 구름 뒤편의 밝은 빛, 재결합한 연인들, 화해한 가족들, 해소된 의문들, 보상받은 충절, 되찾은 재산, 발굴된 보물들, 거만했던 태도를 후회하는 이웃들, 복구된 명성, 사그라든 욕심, 덕망 있는 교구 목사들에게 시집간 노처녀들, 지구 반대편으로 추방당한 모략꾼들,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문서위조범들, 교회의 재단으로 달려가는 난봉꾼들, 보호를 받는 고아들, 치유를 얻은 과부들, 겸손해진 우월감, 아물어가는 상처들, 식탁에 초대받은 탕자들, 바닷속으로 쏟아버린 회한의 쓴잔(盞), 화해의 눈물로 흠뻑 젖은 손수건, 일반적인 노래와 연주, 그리고 제1장에서 길을 잃은 강아지 피도(Fido)가 유쾌하게 짖어대며 집을 향해 뛰어가고 있다.


107p.

그의 꿈은 자신이 '마지막 슬픈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의 선택은 언제나 세상의 슬픔을 줄이는 것이었다. 그에게 위안은 세상에 다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113p.

우리 사이는 영원한 평행선이었어요.


116p.

우리 애들한테 나처럼 살지 말아야 한다고, 성공해야 서럽지 않다고 닦달했으니까요. 어느 날 언니가 그걸 지켜보더니 말했어요. "빛이 안 나도 괜찮아. 하지만 따뜻해야 해."


124~125p.

우리는 최초의 도덕이라고 부를 수 있는 뭔가에 대한 합의를 하게 된다. 이게 보통 사람의 상식이고 이 상식에 근거해서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한다. 그런데 이 평범한 상식은 어느 순간부터 시험에 처한다. 나쁜 사람이 벌 받지 않고 탐욕스러운 사람은 더 큰 이득을 취하고 착한 사람은 바보가 된다고 느껴진다(세월호 이후에는 '어른들 말 잘 들어라'라는 말도 시험에 처했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에 근거해 행동해야 한단 말인가? 어른들은 너도 나이 들어봐, 살아보면 알게 된다고 한다. 과연 그렇게 살아도 될까? 그렇게 뿌리 뽑힌 채 살아가도 괜찮을까?

그런데 부조리한 현실의 무게에 맞서서 자신의 고유함,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냉소주의, 상황주의, "세상은 원래 그래", "남들도 다 그래"란 체념을 뚫고 자기 삶을 사는 것도 이 지점에서다. 그래서 어른들에게는 '다시 배우기'가 필요하다. 삶의 애매함, 복잡함, 모순, 혼란, 불확실을 다루는 법을 아프게 배워야 하고 살면서 배운 것 중 나쁜 것은 버리고 좋은 것을 나누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 일을 해내는 사람은 드물고 현재 우리 사회에 어른들의 성장 이야기는 거의 없다. 그래서 어린 왕자는 이렇게 말한다. "어른들에게 말할 때는 잘 설명해주어야 한다니까요."


134p.

나는 왜 혼자 힘으로는 좋은 것이 좋은 것임을 모르는지 모르겠다. 나는 꼭 남들이 알려줘야 좋은 것이 좋은 것인지 안다. 어쩌면 이래서 타인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좋은 것이 좋은 것임을 아는 사람들이 내 곁에 많았으면 좋겠다.


136p.

느티나무를 스치고 내려온 바람은 땀과 함께 피로와 삶의 무게도 씻겨주었다. 강과 나무의 바람은 두 분을 삶에 부드럽게 녹아들게 했다. 두 분은 기분 좋은 바람이 부는 날은 거울을 볼 필요가 없다고 했다. "바란은 누구든지 훨씬 예쁜 얼굴로 바꿔준다니까." 대책 없이 낭만적인 면이 있던 엄마의 말이다. 엄마는 평상에 앉아서 나무, 꽃, 쏟아지는 별, 은하수, 장독대에 쌓인 눈에 대한 자작시를 적어 자식들에게 보내기도 했다.


138p.

꽃과 놀면서 엄마는 변했다. 꽃은 화려한 계절은 가고 노쇠와 죽음만 남았다고 슬퍼할 수도 있었을 엄마에게 파격적인 생기를 불어넣으면서 엄마를 사로잡는 데 완벽하게 성공했다.


141p.

'꽃이 폈다'도 설레지만 '꽃이 만발하다'는 특별히 아름답다. 문장 자체가 신비롭다. 엄마가 그런 말을 하면 전화기 너머, 만발한 꽃그늘 아래 엄마가 손을 흔들며 서 있는 것만 같다. 하여간 꽃은 우리의 말 습관, 우리 사이의 대화마저 바꿔버렸다. 하긴 이렇게 좋은 말을 참아야 하는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세상엔 달콤한 이름이 참 많다. 그치?" "이름 자체가 다 작품이야."


142p.

아무리 서러워도 어디 기댈 데가 있으면 눈물은 그치게 돼 있어.


145p.

인간이 가진 힘 중 수치로 가장 측정하기 힘든 것 중 하나가 회복력이라고 들었다. 측정하기는 힘들지만 상처받았던 사람들의 회복력이 눈에 띄게 강해지는 순간이 있다고 한다. 대체 그때가 언제일까? 갑자기 다른 사람 혹은 다음 세대, 혹은 다른 생명을 생각할 때, 그때 인간은 놀랍게 회복된다고 한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회복력은 다른 생명도 구하고 자기도 구하는 엄청나게 귀한 힘이다.


151p.

무엇이 우리를 도울지 알 수 없으므로 삶은 신비로운 것이다. 우리에게 이 신비를 선물하는 것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달과 별이다. 달과 별은 오랫동안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길잡이 단어였다. 달과 별은 낮에는 잘 감춰놓을 수 있었지만 밤에는 새어 나오기 마련인 슬픔을 간직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사랑을 받아왔고 그럴 때 달은 '위안' 항목에 속하는 단어다.


152p.

그들의 무릎이나 팔꿈치는 시커멓게 멍이 들었다. 그건 어디 부딪혀서 생긴 타박상이 아니었다. 굴을 캐는 동작을 오래 하다 보면 무릎이나 팔꿈치가 신기하게 그렇게 돼버린다.


155p.

그사이 아내의 몸은 갯벌의 색을 많이 닮아갔다.


159p.

흙은 전에는 사람이었다. 세상 모든 것이 모두 흙에 물들고 흙빛을 닮아간다. 해 지고 달 뜨는 것을 지켜보던 의자도 다리는 반쯤 흙이 되었다.


160p.

인간의 삶은 자연의 시간과 다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제 이런 사람들은 소수다. 거의 사라졌다. 이들의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은 자신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보지 않는 사람들이다. 최고의 행복은 몸을 놀리지 않고 최대한 이득을 얻는 것인 양 사는 사람들과 스마트폰에 고개를 박고 있는 고독한 투자자들이다. 이득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자연을 파괴하고 바다를 오염시키고 물고기를 싹쓸이하는 인간의 탐욕이 가득한 세상에서 물고기들이 무척 사랑한 달은 피눈물을 삼키며 떠오른다. 


165~166p.

과학자들은 데이터를 분석하고 깜짝 놀랐다. 새가 쉬지 않고 날 수 있는 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어마어마했다. 새는 쉬지 않고 8천 킬로미터를 날았고 8일을 하늘에 떠 있을 수 있었다. 그렇게 여행한 거리는 1년간 26,700킬로미터였다. 이 데이터가 B95에 대해서 알려주는 것은 무엇인가? 과학자들은 직선으로 날았다는 가정 하에 B95가 날아간 총거리를 계산했을 때 지구에서 달까지 갔다가 반쯤 돌아올 만큼 먼 거리를 비행했다고 해서 '문버드'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167p.

나는 이 이야기를 들음녀서 달의 여신을 상상했다. 달의 여신이 있어 인간 중 가장 강인한 인간 H95를 보고 백 년도 채 살지 못하는 인간이 지성과 용기로 이룬 일에 너무 감탄한 나머지 그 소식을 온 우주로 널리 알린다. 은하계에 사는 각종 신들은 울먹이면서 감탄한다. 그러나 곧 이렇게 한탄할지 모른다. "곧 지구에 인류가 한 명도 남지 않는 날이 오지 않을까?" 지구가 아프다면 인간이 아프게 한 것이다. 붉은가슴도요새가 멸종된다면 인간이 그렇게 한 것이다.


168p.

나는 우리 인류가 곁에 있던 것이 사라져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존재로 변해버리는 것을 슬퍼하는 능력을 잃지 않았기를 바란다. 우리 인류가 아무런 감동이 없는 세계에서 사는 것을 선택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 인류가 어떤 일이 나쁘다는 것을 알면 그만둘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상상력 없이는 하루도 못 사는 우리 인류가 새들의 비행을 상상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 인간의 심장은 3백 그램이다. 새의 무게는 113그램이다. 우리는 그 작은 새의 용기에서 배울 것이 많다. 난기류와 폭풍우와 번개 속을 나는 새의 용기를 배울 수만 있다면 우리의 용기도 달라질 것이다.


173~174p.

성호는 빗소리를 좋아해서 비 내리는 날이면 창문을 열어놓고 잘 정도였다. 나중에 성호 엄마는 성호가 그리우면 창문을 열고 잤다. 그해 4월 초 성호는 "엄마, 우리 집 앞에 핀 벚꽃은 저녁 8시쯤에 보면 제일 예쁘다"고 말했다. 그 기억이 성호 엄마에게 우리 성호는 벚꽃을 좋아한다고 말하게 만들었다.


175p.

4월 28일 장례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성호의 컴퓨터로 로그인되어 있던 아들의 트위터를 봤다. 마지막 트윗은 4월 16일 오전 10시 1분. "살려달라고요." 성호가 엄마한테 보낸 마지막 문자는 그보다 조금 늦은 10시 6분이었다. "문자를 보냈거든요. 살아서 갈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엄마한테는." 책을 좋아하던, 소설가가 꿈이었던 아이의 생애 마지막 문장은 "살아서 갈 테니까 걱정하지 마"였다.


179~180p.

"9・11 메모리얼 파크에 가면은요, 9・11 때 창문이 딱 한 장 안 깨진 게 있어요. 그게 전시되어 있어요." "건물이 붕괴되었을 때 깨지지 않은 유리가 한 장 있다는 거죠?"

다른 의미의 두 창을 보세요. 그 상황에서도 꿋꿋이 멀쩡하게 살아 있는 유리창. 대견한 유리창. 9・11의 유리창이죠. 그리고 세월호의 우현 선수에 있는 그 유리창. 그 저주받은 유리창. 깨지지 않은 유리창. 두 유리창을 비교해보세요. 한쪽 유리창은 희망이고요, 한쪽 유리창은 절망이에요. 나는 모르겠어요. 뭐가 깨지지 말아야 하고 뭐가 깨져야 하는지.


191p.

우리 형, 그리고 그날 생을 떠난 2,977명은 모두 하나의 숫자가 아니에요. 모두 자기 인생 이야기가 있던 사람들이에요. 역사를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형은 이제 역사의 일부가 되고 있어요.


193p.

타워의 4만 장 유리 중에 산산조각 나지 않은 딱 한 장의 유리창이 있어요. 딱 한 그루 불타지 않은 나무와 함께 그 유리창은 회복력과 희망의 상징이에요. 깨지지 않은 유리창이 있는 이곳은 처음 도착한 구조대와 시민들이 타인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많은 이야기들이 있는 곳이에요.


193~194p.

9・11은 대단히 비극적인 사건이었지만 그 당시에 우리가 서로에게 연민을 보여준 방식, 생판 모르는 타인을 위해 자기 삶을 던졌던 것, 같이 격려하면서 한 발이라도 내디딘 것, 뭐라도 좋으니 도움이 되려고 했던 것, 함께 슬퍼했던 것의 의미는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러도 퇴색하지 않을 거예요. 이 추모관은 자기희생의 이야기가 가득한 곳이에요. 그래서 이 추모관은 사랑이고 이타심이에요. 저는 세월호 소식을 알아요. 대부분의 희생자가 살 날이 훨씬 많았던 아이들이란 것을 알아요. 그래서 더더욱 그 아이들을 명예롭게 하고 아이들의 삶을 우리들의 이야기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 중요해요.


213~214p.

에릭은 열등한 사람을 미워했고 딜런은 자신이 열등하다고 생각했다. 에릭은 노트에 증오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썼고 딜런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썼다. 에릭에게는 사랑의 욕구가 없었고 딜런은 사랑을 갈구했다. 에릭은 인간은 쓸모없는 존재이기에 인간의 멸종을 바랐고 열등한 사람을 미워했고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폭탄을 만들었다. 딜런은 총을 구하고 싶어 했다. 자기를 쏘기 위해서였지 남을 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에릭은 죽이고 싶어했고 딜런은 죽고 싶어 했다. 에릭은 인간이 고통받기를 바랐고 딜런은 자신의 고통을 끝내고 싶어 했다. 에릭은 남들에게 화를 냈고 딜런은 자신에게 화를 냈다. 에릭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항상 알고 있었고 딜런은 아니었다.


215~216p.

그날 이후 '레벨스 프로젝트(Rebels Project)'라는 단체가 만들어졌다(총기 사고 생존자들의 조직으로, 레벨스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콜럼바인의 언덕 이름이다). 나는 플로리다 마저리스톤먼 더글러스 고등학교에서 총기 사건이 발발한 뒤 생존 학생들이 희생자(victims), 생존자(survivors), 변화를 만드는 자(change makers)라는 정체성으로 '삶을 위한 행진(March for Our Lives)'을 주도한 것을 알게 되었다. 이 고등학생들의 모습이 내게는 대단히 중요한 자기규정으로 보였다. 그들은 결코 피해자로 머무르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엄청나게 미래지향적 ⎯ 그들은 미래가 현재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미래가 현재와 똑같다면 뭣 하러 말을 하겠는가? ⎯ 이었고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228p.

세상은 서로의 차이를 서럽도록 강조하고 우리는 서로를 결코 이해하지 못하고 그 사이에 시간은 오싹할 만큼 창백하고 차갑게 흘러가지만, '우리'가 될 수 있다면 많은 것이 달라진다. 타인은 힘겨운 지옥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언제나 고독을 뚫고 나오게 하는 것 또한 타인의 존재다. 사실, 우리가 눈물 흘리는 것도 우리가 혼자라고 생각해서 아닌가? '우리'가 되면 내게 일어난 많은 일은 내게만 중요한 일이 아니게 된다. 한때 혼자서만 슬퍼했던 경험이 공통의 경험이 된다. 거기서 나는 내가 아닌 척할 필요가 없다. 훨씬 더 이상적인 나인 척할 필요도 없다. 아무 일도 겪지 않은 것처럼 행동할 필요도 없다.


229p.

'우리'는 (혼자일 때는 드러나지 않았던) 저마다의 숨겨진 힘을 보여줄 수 있는 단어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자신의 가치를 발견한다. 나누고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자신에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나에게 도움이 되었던 것은 타인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목소리를 나누는 것이 치유인 이유는 내가 존재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내가 왜 이 일을 겪었을까 잠시나마 이해 비슷한 것에 이르기도 한다. 우리는 '우리'라는 단어 안에서 혼자일 때조차 혼자가 아닐 수 있다. 혼자일 때조차 함께 있게 된다.


229p.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간다"는 말은 매번 거의 같은 정도의 무력감에 시달렸다는 말이다. 그래도 믿을 만한 관계 속에서 한 발 한 발 나아갔다는 말이다. 믿을 만한 관계는 다음 걸음을 내딛는 계기가 된다. 이럴 때 인간관계는 현실에 존재하는 힘이고 누군가 힘이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이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230p.

"어둠에서 온 빛"이라는 말은 어둠 속에서, 침묵 속에서, 고립 속에서, 고독 속에서 빛나는 생각 하나가 태어났다는 말이다. 어떤 빛나는 말이 있어도 그것의 고향은 어둠이라는 뜻이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말을 빌리면 이야기는 암흑 속에 있다. 지하세계는 어마어마한 비밀을 숨기고 있고 당신이 갖고 싶어 하는 모든 비밀이 거기 있다. 지하세계에는 이야기가, 아니 꽤 많은 이야기가 감춰져 있다는 것이다.


233p.

사랑만으론 부족합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일을.


241p.

'나는 잘못 살았구나!' 그 느낌이 얼마나 쓰라리고 가슴 철렁한 것인지 안다. 그리고 내가 잘못 산 여파로 남에게 준 상처가 얼마나 후회되는 일인지도 안다. 그런 일들을 몇 번 겪었다. 지금도 나의 일부는 분명히 잘못 살고 있을 것이다.


244~245p.

선라이즈라고? 귀가 번쩍 트였다. 나는 빛이 어둠을 뚫고 올라오는 것을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을 보면 나의 어두운 자아도 힘을 내보려고 애쓸 것만 같았다.


246p.

바다에서 오직 '살아 있는 것들'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 죽은 생명이, 아직 살아 있는 것들을 눈물 흘리며 부러워할 만한 단 한 가지 일인 ⎯ 생명의 약동 같은 장면이 펼쳐지고 내가 그것을 꿈결처럼 본 것만 같았다.


246~247p.

돌고래는 돌고래라면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모습 그대로 나타났다. 유선형의 몸통, 바다 저 깊은 곳에서 뿜어내는 듯한 날숨, 유쾌한 도약. 돌고래는 너무나 돌고래여서 다른 물고기와 헷갈릴 수가 없었다. 너무나 돌고래인, 다른 것일 리가 없는 온전한 생명체, 불멸이면 좋겠는 생명체. 그 생명체는 깊고 탁 트인 바다에서 자유롭게, 환희에 가깝게 움직이고 있었다.

한 번이라도 나는 그렇게 온전히 기쁘게 살아 있고, 있는 그대로 존재했나? 가끔 있었다. 드물게 나의 마음에 모순이 없는 순간이, 내가 그냥 나 자신인 투명한 시간이.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 돌고래처럼 그렇게 '있는 그대로' 자유롭게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그렇게 투명하지 않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조차 불투명한, 어슴푸레한 존재다. 우리 인간은 쓸데없는 것을 많이도 덧붙이는 자아가 있는 존재다. 결국 우리에게는 계속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인간이기를 추구해야만 하는 삶이 주어졌을 뿐이다.


250~251p.

나는 그날 바다거북에게 아주 순수한 존경심을 품게 되었다. 그렇게 머나먼 고독의 냄새를 풍기면서도, 그렇게 열심히 살아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나는 그날 거북이 혼자 있었기 때문에 그의 친구가 되고 싶었다. 당장 검은 등판을 가진 그 거북의 친구가 되고 싶었다. 만약 다른 외로운 것이 있다면 또 그 외로운 것의 친구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과연 그만큼 강할까? 외로운 것들을 지켜줄 수 있을 만큼?


251p.

아주 조용한 밤이었다. 밤은 너무 순수해서 침묵 말고는 그 무엇도 어울릴 것 같지 않았다(밤의 순수함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기 때문에 도스토옙스키는 『백야』에서 이런 표현을 썼을 것이다. "아름다운 밤이었다. 우리가 젊었을 때만 만날 수 있는 그런 밤이었다").


253~254p.

나는 5년간 매일매일 반딧불이를 보는 느낌이 어떠냐고 물어봤다. 그때 나는 무슨 대답을 기대했던가? 매일 보면 아름다움도 평이해진다는 그런 것이었을까. (...) 그는 반딧불이 한 마리를 잡아 손바닥에 올려 놓았다. 작고 완벽한 빛 하나가 그의 손을 그 누구의 손과도 같지 않은 특별한 손으로 만들어줬다. 그의 손바닥에 영혼이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등 뒤로 검은 강물 소리가 애잔하게 울려 퍼졌다. 그는 나지막하게, 느리게, 또박또박, 마치 나에게가 아니라 반딧불이에게 대답하듯, 가난과 어둠과 별과 빛을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의 우아함을 담아 이렇게 대답했다.

"스틸 뷰티풀(Still Beautiful)."


254p.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그것이 행복의 언어인 것을 알았다. 슬픔에 짓눌려 있던 내 안의 무언가가 그의 말에 반응했다. 내가 몰두해 있던 나의 어두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가 얼핏 보였다. 아름다움은 슬픔조차도 꿰뚫고 지나는 강력한 힘을 가진 단어고 우리가 다른 세계에 눈을 뜨게 돕는다.


261~262p.

온갖 동물들이 멸종되는 이 시기에, 인간이 저지른 끔찍한 일들의 여파가 속출하는 이 시기에 굳이 '인간'을 가지고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거지? 하지만 어떤 미래가 오든 미래는 결국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다. 나는 다른 것은 몰라도 인간이 인간일 때 얼마나 우아할 수 있는지는 알고 있다. 그래서 인간이 지금과 다르게 존재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낭비하지 않는 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슬픈 세상의 기쁜 말>에서 얻어 꼭 써보고픈 표현과 단어



* 선창 : (1)화물을 적부하는 상갑판 아래의 용적을 말한다. (2)물가에 다리처럼 만들어 배가 닿을 수 있게 한 곳.

* 이울다 : 해나 달의 빛이 약해지거나 스러지다.

* 축출되다 : 쫓겨나거나 몰아내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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