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무라카미 하루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中, 오랜만에 만나는 이면의 세계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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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p.

그런 시간에는 너에게도 나에게도 이름이 없다. 열일곱 살과 영여섯 살의 여름 해질녘, 강가 풀밭 위의 선명한 기억 ─ 오직 그것이 있을 뿐이다.


32p.

머리는 짧고, 가지런히 자른 검은 앞머리가 이마를 덮고 있다. 신중히 선택한 그림자처럼.


33p.

"네가 쓴 글을 더 읽고 싶어." 내가 말한다. 실수로 다른 방문을 열어버린 사람이 서투르게 변명하듯이.


36p.

주위는 완벽히 고요했다. 깊은 물속 같은 침묵이다.


46~47p.

첫 일주일이 가는 동안, 나는 네가 골라준 '오래된 꿈' 몇 개를 집어들고 읽으려 시도했다. 그러나 그 오래된 꿈은 내게 의미 있는 말을 하나도 들려주지 않았다. 내가 들은 것은 불확실하게 꿈틀대는 중얼거림이고, 본 것은 초점이 맞지 않는 단편적인 이미지 몇 개뿐이었다. 조각을 되는대로 이어붙인 녹은 테이프나 필름을 거꾸로 재생하는 기분이었다.


48p.

그 분위기가 잔향처럼 아직 주변을 희미하게 떠다닌다.


52p.

움직임이 없고 말수 적은 이 도시에서 너는 태어나 자랐다. 간소하고 정밀한, 그리고 완결된 장소다.


53p.

사람들이 하는 말은 본래의 의미만을 지니고, 모든 것이 각자 고유의 장소에, 혹은 눈길이 닿는 그 주변에 흔들림 없이 머물러 있다.


57p.

일기는 안 쓰면서 꿈은 빠짐없이 기록한다니, 마치 나에겐 현실의 일상생활보다 꿈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공언하는 거나 다름없어 보이네.


58p.

게다가 다른 애들이 꾸는─꿨다고 말 해주는─꿈은 대개 색채나 감정의 동요가 결여되어 잘 와닿지 않는 것들이었어.


70p.

"당신의 그림자도 머지않아 생명을 잃겠죠. 그림자가 죽으면 어두운 생각도 함께 사라지고, 그뒤엔 정적이 찾아와요."

네가 말하는 '정적'이라는 단어가 한없이 고요한 것처럼 들린다.


71p.

나는 깎아지른 듯 높이 솟은 두 감정의 골짜기를 빠져나와 천천히 걸어서 집으로 돌아간다. 이 도시에서 나는 더이상 외톨이가 아니라는 생각과, 그럼에도 철저히 외톨이라는 생각 사이를. 내 마음은 그렇게 정확히 둘로 쪼개져 있다.


73p.

나는 의자에 앉아 나라는 신체의 우리에서 의식을 해방시켜 상념의 너른 초원을 마음껏 달리게 한다─개의 목줄을 풀어 잠깐의 자유를 주는 것처럼.


76p.

그러나 내게 침묵은 조금도 고통스럽지 않다. 오히려 그 침묵을 환영했는지도 모른다. 침묵은 기억을 일깨워주므로.


78p.

5월의 일요일 아침, 맑게 갠 하늘에 한 조각 떠 있는 흰구름은 미끈한 물고기 모양이다.


79p.

나는 바다에 비가 내리는 광경을 볼 때마다 어떤 감동을 받는다. 아마 바다가 영겁에 걸쳐─혹은 거의 영겁에 가까운 시간 동안─변화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바닷물은 증발해 구름이 되고 구름은 비를 내린다. 영원한 사이클이다. 바닷물은 그렇게 조금씩 교체되어간다. 그러나 바다라는 총체가 변화하는 일은 없다. 바다는 늘 똑같은 바다다.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실체인 동시에, 하나의 순수하고 절대적인 관념이기도 하다. 내가 바다에 쏟아지는 비를 보면서 느끼는 건 (아마도) 그런 종류의 엄숙함이다.


80p.

이미 완결된 것이 새삼 몸을 일으킨다 한들 어디로 갈 수 있을까? 어쩌면 그것이 영겁이 지닌 한 가지 문제점인지도 모른다. 지금부터 어디로 향하면 좋을지 모른다는 것.


81p.

나의 의지와 성욕이 각기 다른 지도를 손에 들고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기분이다.


83p.

그처럼 꼴사나운 짓을 하는 나를 더는 보기 싫어진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부끄러워서 귓불이 달아오른다. 그런 건 어쩔 수 없어, 라고 나는 열과 성을 다해 너에게 설명하고 변명한다. 그건 시커먼 대형견 같은 거야. 한번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손쓸 도리가 없어. 아무리 튼튼한 목줄을 매어 잡아당겨도─


84p.

"왜 그래?" 나는 마침내 소리 내어 말한다. "무슨 일 있었어?"

너는 잠자코 고개를 가로젓는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걸 나는 알 수 있다. 인간의 가청범위 바깥에 있는, 섬세한 고속의 날갯짓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다.


85p.

오래 지나지 않아 나는 조금씩 깨닫는다─네가 어느 특정한 장소를 향해 걷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너는 그저 한 장소에 머무르고 싶지 않아 걸음을 옮길 뿐이다. 이동 그 자체가 목적인 이동이다. 네 보폭에 맞춰 나는 나란히 걷는다. 역시 침묵을 지키면서. 하지만 나의 침묵은 올바른 어휘를 찾아내지 못한 사람의 침묵이다.


87p.

이윽고 너는 울기 시작한다. 소리를 죽이고 몸서리치듯 어깨를 가늘게 떨면서. 너는 울지 않으려고 지금껏 쉬지 않고 걸음을 서둘렀나보다.


95p.

고열은 일주일쯤 이어졌다. 열은 내 몸을 물집으로 뒤덮으며 어둡고 긴 꿈으로 잠을 채우게 했다. 구역질이 파도처럼 단속적으로 밀려왔지만 속이 메스꺼울 뿐 실제로 토하지는 않았다. 잇몸이 무디게 욱신거리고 씹는 힘이 사라진 기분이었다. 이대로 고열이 이어지면 치아가 몽땅 빠져버리는 게 아닐까 불안해질 정도였다.


106p.

"그렇게 되는 데 무슨 원인이 있어? 이를테면 불쾌한 일이 생겨서 우울해졌다든가."

너는 고개를 짓는다. "특별히 구체적인 원인 같은 건 없어. 그냥 순수하게 그렇게 돼버릴 뿐이야. 커다란 파도 같은 게 소리 없이 머리 위를 뒤덮고 나를 집어삼켜서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버려. 언제 닥쳐오고 얼마나 이어질지 예측할 수 없어."


107p.

"마음이 굳는다라."

너는 잠시 생각한다. "그러니까 마음속의 끈이 엉망진창으로 엉키고 굳어서 풀 수 없어지는─그런 거야. 풀려고 하면 할수록 더 단단하게 뭉쳐져. 전혀 손을 못 댈 정도로 딱딱하게. 너는 그런 때 없어?"


110p.

열일곱 살이고, 사랑에 빠져 있고, 그날은 5월의 청명한 일요일이니 당연히 내게 망설임 같은 건 없다.

너는 스커트 무릎 위에 놓인 작은 흰색 손수건을 집어들어 다시 한번 눈가를 닦는다. 새로 솟은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는 게 보인다. 희미하게 눈물 냄새가 난다. 눈물에도 엄연히 냄새가 있구나, 나는 생각한다. 마음을 파고드는 냄새였다. 상냥하고 매혹적이고, 그리고 물론 어렴풋이 슬프다.


114p.

몇 가지 불온한 가능성이 머릿속을 오간다. 그러나 생각을 정리할 수 없다. 무언가를 생각하려 들면 의식이 묵직한 자루가 되어 바닥 모를 구렁으로 가라앉았다.


118p.

꿈 읽기 작업을 거듭하는 사이 나는 그런 '통과의 감각'을 강하게 느꼈다. 그들이 원하는 건 일반적인 의미의 이해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되는 면이 있었다. 그리고 나를 통과해 가는 그것들은 때때로 나의 안쪽을 기묘한 각도에서 자극하고, 오랫동안 망각했던 내 안의 몇 가지 감흥을 일개웠다. 긴 세월 병 바닥에 쌓여 있던 오래된 먼지가 누군가의 숨결에 의해 허공으로 훅 피어오르는 것처럼.


127p.

"육체는 영혼의 신전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더라만." 문지기가 말했다. "맞는 소리인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처럼 날마다 가련하게 죽어나간 짐승들 뒤처리나 하다보면 육체 따위, 신전은커녕 그저 너저분한 폐가라는 생각밖에 안 들어. 그리고 그런 궁상맞은 용기에 욱여넣어진 영혼 그 자체에 점점 신뢰를 잃는단 말이지. 그까짓 거, 사체와 함께 유채기름을 끼얹어 확 불살라버리면 되지 않나 싶을 때도 있어. 어차피 살아서 고통받는 재주 말고는 없으니. 어때, 내 생각이 틀렸나?"


156p.

오랫동안 편지를 쓰지 못했지. 몇 번 시도는 했는데 번번이 좌절했어. 몇 줄 쓰고 나면 벽에 쿵 부딪히고 마는 거야. 아무리 애써도 한 문장이 다음 문장으로 이어지지 않아. 어떤 말도 서로 연결되기를 거부하고 뿔뿔이 흩어져버려. 그리고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아.


157p.

오늘은 이렇게 어찌어찌 만년필을 쥐고 글을 쓸 수 있어. 이유는 모르겠지만 마치 두꺼운 구름이 갈라지고 틈새로 밝은 햇빛 한줄기가 쨍하니 비치는 것처럼 글이 써져. 바로 지금, 정말 정말 오랜만에...... 신기하지. 이건 기적의 자투리 같은 것일지도 몰라. 그러니 그 자투리가 손안을 빠져나가기 전에 서둘러서 이 편지를 쓰려고 해. 그래, 시간과의 싸움이야(침몰 직전인 배의 통신실에서 필사적으로 마지막 통신을 보내는 기사의 절박함을 상상해줘.)


160p.

나는 여러모로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그때 말했지. 정확한 표현은 잊어버렸지만 그런 말을 했던 건 기억해. 너는 기억하니? 그런데 이제는 나에게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은지도 몰라. 그래서 톡톡톡, 필사적으로 키를 두드리고 있어. 톡톡톡톡...... 어쩌면 통신문을 끝맺지 못할지도 몰라. 바닷물이 당장이라도 문을 부수고 밀려들지도 몰라. 차갑고 심술궂고 짜디짠, 지극히 치명적인 바닷물이.


161p.

너는 수선한 흔적이 있고 조금 빛바랜, 그러나 청결해 보이는 옷을 입고 있었다. 그 검소하고 군더더기 없는 차림이 어떤 옷보다도 너의 아름다움과 젊음을 돋보이게 했다. 매끄럽고 탄력 있는 피부는 유채기름 램프 불빛 아래서 싱싱한 광채를 발했다. 방금 전에 막 완성된 것처럼.


172p.

쓸쓸한 외톨이로 보낸 여름이었다. 나는 어두운 계단을 내려간다. 계단은 끝없이 이어진다. 이쯤이면 지구의 중심에 닿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그러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내려간다. 주위 공기의 밀도와 중력이 점점 바뀌어가는 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고작해야 공기 아닌다. 고작해야 중력 아닌가.

그렇게 나는 더욱 고독해진다.


177p.

"오래된 꿈이란, 이 도시가 성립하기 위해 벽 바깥으로 추방 당한 본체가 남겨놓은 마음의 잔향 같은 것 아닐까요. 본체를 추방하더라도 송두리째 모조리 들어낼 순 없고, 아무래도 뒤에 남는 게 있어요. 그 잔재들을 모아 오래된 꿈이라는 특별한 용기에 단단히 가둔 겁니다."


186p.

오래된 꿈 그것은 내 그림자가 추측하듯 긁어내어져 밀폐 보존된 사람들 마음의 잔재일까? 나로서는 그 가설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다. 내가 보는 한 눈앞에 있는 건 병조림처럼 가둬진 '혼돈의 소우주'일 뿐이다. 우리의 마음이란 이토록 불명료하고 일관성이 결여된 것인가? 혹은 오래된 꿈이 이처럼 단편적이고 혼란스러운 메시지밖에 내보낼 수 없는 건, 그것이 결속된 하나의 마음이 아니라 '남은 부스러기'를 모은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일까?

내 꿈에 나왔던 하사관은 메마른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때로는 의식을 죽이는 게 가장 편한 길로 여겨지니까요."


191p.

하지만 어느 날 문득 눈이 번쩍 뜨인다. 그 각성의 직접적인 계기가 무엇이었는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도 지극히 사소하고 흔하디흔한 일이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이를테면 막 삶은 달걀의 냄새라든가, 귀에 와닿은 추억의 음악 몇 소절이라든가, 방금 다림질한 셔츠의 감촉이라든가...... 그것이 의식의 특별한 부위 어딘가를 자극해 흠칫 눈을 뜨게 한 것이다.


194p.

침묵과 무는 변함없이 내 곁에 찰싹 달라붙어 있다. 이제는 그들의 존재에 완전히 익숙해졌다. 아니, 그렇다기보다 이미 나의 일부다. 침묵과 무...... 그들을 빼고서는 나라는 인간을 말할 수 없게 되었다.


196p.

하지만 나는 몹시 지쳐 있다. 바닥에서 몸을 일으킬 수 없다. 손을 들어올리기 어렵고, 눈을 뜨고 있기조차 힘들다. 몸이 산산조각나 흩어질 것처럼 피로하다. 나는─나는 천천히 눈을 감고 다시 의식을 잃는다. 그리고 깊은 비의식의 바다로 가라앉는다.


207p.

그리고 나와 그림자는 단단한 벽돌로 이뤄져 있을 두꺼운 벽을 반쯤 헤엄치다시피 통과했다. 마치 부드러운 젤리층을 헤치고 나아가는 것처럼.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감촉이었다. 그 층은 물질과 비물질 사이의 무언가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시간도 거리도 없고, 고르지 못한 알갱이가 섞인 듯 독특한 저항감이 느껴질 뿐이다.


228p.

나는 그저 이 현실이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낄 뿐이다. 이 장소의 공기가 내 호흡기에 맞지 않는다, 라고 바꿔 말해도 될 정도로.


230p.

그렇다, 나는 이 지상에 정지한 쇠공일 뿐이다. 매우 묵직하고 구심적인 쇠공이다. 나의 사념은 그 안에 단단히 갇혀 있다. 겉보기는 볼품없지만 중량만은 충분히 갖추었다. 지나가던 누군가가 힘껏 밀어주지 않으면 어디도 갈 수 없다. 어느 쪽으로도 움직일 수 없다.


231p.

일을 그만두고 자유의 몸이 된 지 두 달 남짓, 그렇게 움직임을 잃은 일상이 계속된다. 끝나지 않는 무풍의 나날이다.


234p.

긴 꿈에서 깬 건 날이 밝기 전이었다. 주위는 아직 어둑하다. 그것이 꿈이었음을 인식할 때까지─그 꿈의 세계에서 내 몸을 완전히 걷어내어 이쪽 현실로 가져올 때까지─시간이 걸렸다. 미묘한 중력의 조정 같은 것이 필요했다.


235p.

나는 드디어 어딘가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새로운 관성을 얻어 차츰 전진한다. 생생하고 또렷한 꿈의 강력한 후원을 받으며.


247p.

"나는 내 그림자가 아무래도 신경쓰여. 특히 최근 들어서. 자기 그림자에 대해 인간으로서 져야 할 책임 같은 걸 느끼지 않을 수가 없어. 과연 나는 내 그림자를 지금껏 당당하게, 공정하게 대해왔을지."


268p.

훗날 고야스 씨는 자신이 왜 일상적으로 스커트를 입는지 친절하고 알기 쉽게 설명해주었다.

"첫째로는, 이렇게 스커트를 입고 있으면, 네, 왠지 내가 아름다운 시의 몇 행이 된 듯한 기분이 들어서랍니다."


291p.

"그런 건 여기서 하루하루 일하다보면 차차 알게 될 겁니다. 때가 되면 동이 트고, 이윽고 햇살이 창으로 흘러드는 것처럼요. 지금은 그런 데 크게 신경쓰지 말고, 일단 이곳의 업무를 차근차근 익히십시오. 그리고 이 작은 마을에 마음과 몸을 길들여주세요. 지금으로선, 네,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답니다. 괜찮습니다."


301p.

하지만 그 방의 공기는 이상하게 매캐하고, 잊혀버린 시대의 냄새가 났다. 그리고 커튼과 소파의 천 색깔이 왠지 모르게 불온한 분위기를 풍겼다. 과거 이곳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의 부적절한 비밀을 머금고 있는 것처럼. 설령 지독한 졸음이 덮쳐온다 해도 여기서 낮잠을 자고 싶을 것 같진 않다.


307p.

게다가 나는 굳이 말하자면 적당한─그럭저럭 참을 수 있을 정도의─추위를 사랑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벽에 둘러싸인 그 도시에서 일상적으로 맛보았던 것이니까. 주위를 감싸는 냉랭한 공기는 그 도시에서의 생활을 다시금 내 마음에 되살려주었다.


338p.

그 홍차에는 설탕도 밀크도 레몬도, 다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 자체로 훌륭하게 완결된 홍차였다. 온도도 그야말로 완벽하다. 농밀하고, 향긋하고, 따뜻하고, 또한 기품을 있었다. 신경을 온화하게 어루만져주는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만약 거기에 무얼 더하면 그 완결성은 틀림없이 손상될 것이다. 짙은 아침안개가 햇빛에 지워져버리는 것처럼.


361p.

우리는 한정된 시간 안에 여러 가지 중요한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아마 논리적인 의미를 찾기 힘들, 대체로 관념적인 영역에 속하는 많은 이야기들을. 따라서 미리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하고 이야기의 순서를 정해둘 필요가 있다. 그러지 않으면 나는 단서를 찾아 수수께끼 가득한 어둠의 세계를 언제까지고 헛되이 떠도는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


380p.

고야스 씨는 한때 자신이라는 존재의 의미를 잘 파악하지 못해 고뇌했지만 이제 그런 건 아무려나 상관없었다. 부모에게서 한 덩어리의 정보를 물려받아, 자기 나름대로 약간의 수정과 가필을 하여 다시 자기 아이에게 물려준다─결국 자신은 단순한 일개 통과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긴 쇠사슬의 고리 하나일 뿐이다.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381p.

한마디로 표현하면 그는 전망 좋고 평탄한 대지 같은, 중년기라는 영역에 발을 들인 것이다.


385p.

뒤이은 건 모든 소리가 어딘가로 싹 빨려들어가버린 듯 기분 나쁜 침묵.


387p.

그래도 가스불 생각이 좀처럼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의식불명인 아이 옆에서 가스불을 어쩌고 나왔나란 생각에 매달리는 건 아마 그녀에게 필요한 일이었으리라. 어떻게든 제정신을 지키기 위해서.


389p.

어쨌거나 인생은 장기전이다. 그 길에 아무리 큰 슬픔이 있더라도, 상실과 절망이 기다리더라도, 한 걸음 한 걸음 착실하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427p.

현재의 현실에서 벗어나 다른 시간과 다른 장소에 섞여든 듯한 기묘한 감각이다.

아니면 나인 척하는, 내가 아닌 나인지도 모른다. 거울 속에서 마주보는 건 내가 아닌 나인지도. 영락없이 나처럼 보이는, 그리고 나와 똑같은 동작을 하는 다른 누군가인지도 모른다. 그런 기분도 없지는 않다.


429p.

그 숫자 자체가 소리 높여 많은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다. 때로는 말보다 숫자가 더 많은 이야기를 한다.


431p.

비록 제목이 생각나지 않아도 조용한 휴일 아침에 듣기에 어울리는 음악이다. 아주 먼 옛날부터 살아남아온 아름답고 기분좋은 멜로디.


433p.

나는 누우면 바로 잠드는 타입이다. 머리맡에 책을 한 권 놔두긴 하지만 펼칠 일이 거의 없다. 그리고 보통은 아침햇살과 함께 저절로 눈을 뜬다. 아마 좋은 별자리를 타고난 인간인가보다. 많은 이들이 불면의 고통을 호소할 때마다 실감한다.


436p.

걸으면서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머릿속에 있는 건 그저 기분좋은 공백이었다. 혹은 무였다. 눈의 예감을 품은 싸늘함이 무쇠팔처럼 내 의식을 호되게 추궁하고 지배했다. 춥다는 것 말고 다른 감각이 파고들 틈은 눈곱만큼도 없다.


444~445p.

당신은 필시 자신의 의지로 그 불가사의한 도시에 들어갔고, 역시 자신의 의지로 이쪽으로 돌아온 겁니다. 당신을 튕겨낸 용수철은 당신 자신의 내부에 있는 특수한 힘일 테지요. 마음속 밑바닥의 강한 의지가 그 엄청난 왕래를 가능케 했습니다. 스스로의 논리와 이성을 초월한 영역에서.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 얻어 꼭 써보고픈 표현과 단어



* 야트막하다 : 조금 얕은 듯하다.

* 정경 : 정서를 자아내는 흥취와 경치.

* 잣다 : 물레 따위로 섬유에서 실을 뽑다.

* 농밀하다 : 짙고 빽빽하다.

* 축일 : (명사)하나하나 쫓음. (부사)빼지 않고 하나씩 하나씩.

* 공언하다 : 여러 사람 앞에 명백하게 공개하여 말함. 또는 그렇게 하는 말.

* 헐레이션 : 강한 빛이 필름이나 사진 건판에 닿았을 때, 그 면에서 반사된 빛이 다시 유제(乳劑)에 닿아 감광되는 현상.

* 투함 : 편지, 투서, 투표용지 따위를 우체통, 투서함, 투표함 따위에 넣음.

* 달변 : 능숙하여 막힘이 없는 말.

* 되잖다 : 올바르지 않거나 이치에 닿지 않다.

* 시렁 : 물건을 얹어 놓기 위하여 방이나 마루 벽에 두 개의 긴 나무를 가로질러 선반처럼 만든 것.

* 적확하다 : 정확하게 맞아 조금도 틀리지 아니하다.

* 무위 :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음. 또는 이룬 것이 없음.

* 젠체하다 : 잘난 체하다.

* 필설 : 붓과 혀라는 뜻으로, 글과 말을 이르는 말.

* 정연히 : 가지런하고 질서가 있게.

* 후터분하다 : 불쾌할 정도로 무더운 기운이 있다.

* 풀무질 : 풀무로 바람을 일으키는 일.

* 주파하다 : 도중에 쉬지 아니하고 끝까지 달리다.

* 파문 : (1)수면에 이는 물결. (2)물결 모양으로 이루어진 무늬. (3)어떤 일이 다른 데에 미치는 영향.

* 정주하다 : (1)일정한 곳에 자리를 잡고 살다. (2)어떤 장소에 머무르다.

* 연찬 : 학문 따위를 깊이 연구함.

* 단견 : (1)짧은 생각이나 의견. (2)자기의 생각이나 의견을 겸손하게 이르는 말.

* 고만조만 : 그저 고만한 정도로.

* 연통 : 양철이나 슬레이트 따위로 둥글게 만든 굴뚝.

* 등화관제 : 적의 야간 공습 시, 또는 그런 때에 대비하여 일정한 지역에서 등불을 모두 가리거나 끄게 하는 일.

* 응분 : 어떠한 분수나 정도에 알맞음.

* 변용 : 어떤 악곡을 기존과 다른 선율로 변형하는 방식. 잘 알려진 곡을 기존과 다른 선율로 편곡하는 방식이다.

* 용구 : 무엇을 하거나 만드는 데 쓰는 여러 가지 도구.

* 해후 : 오랫동안 헤어졌다가 뜻밖에 다시 만남.

* 연석 : 차도와 인도 또는 차도와 가로수 사이의 경계가 되는 돌.

* 경천동지 : 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뒤흔든다는 뜻으로, 세상을 몹시 놀라게 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생몰년 : 태어난 해와 죽은 해를 아울러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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