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p.
가마가 말이죠,라고 무재씨가 말했다. 전부 다르게 생겼대요. 언젠가 책에서 봤는데 사람마다 다르게 생겼대요. 그렇대요? 그런데도 그걸 전부 가마,라고 부르니까, 편리하기는 해도, 가마의 처지로 보자면 상당히 폭력인 거죠. 가마의 처지요? 가마의 처지로 보자면요, 뭐야, 저 '가마'라는 녀석은 애초에 나와는 닮은 구석도 없는데, 하고. 그러니까 자꾸 말할수록 들켜서 이상해지는 게 아닐까요.
43p.
나는 쇄골이 반듯한 사람이 좋습니다. 그렇군요. 좋아합니다. 쇄골을요? 은교씨를요. ......나는 쇄골이 하나도 반듯하지 않은데요. 반듯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좋은 거지요.
65p.
팔월엔 비가 내렸다. 거의 매일 내렸다. 퍼붓듯 쏟아지다가 반짝 갰다가 꾸물꾸물 어두워졌다가 툭툭 떨어지다가 다시 한차례 퍼붓고 점차 가늘어져서 그 비가 밤새 이어지는, 뒤끝 있는 날씨가 계속되었다. 이불이 묵직해서 이따금 보일러를 틀어두고 잤다.
72p.
쥐며느리가 정말 물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입이 있는데, 어째서 물지 않습니까. 입이 있다는 것은 틀림없이 무언가를 깨문다는 의미인데 말입니다.
78p.
나는 그 입도 보았습니다. 더없이 무기력한 입, 그림자에게 압도당하고 만 입, 그림자가 들락거려 혀가 검게 물드는 것을 모르고 조그맣게 벌어졌다 닫히곤 하는 그녀의 입을 보고 있었습니다.
95p.
듣고 보니 할아버지의 발 부근에서 그림자의 농도가 유난히 묽었다.
99p.
차라리,라고 생각했다. 어두운 것이 되면 이미 어두우니까, 어두운 것을 어둡다고 생각하거나, 무섭다고 생각하는 일은 없지 않을까, 아예 그렇지 않을까, 어둡고 무심한 것이 되면 어떨까, 그렇게 되고 나면 그것은 뭘까,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 모르겠다 모르겠어, 모르도록 어두워지자, 이참에,
136p.
같이 달려요. 그러고 있어요. 아뇨, 계속 엇갈리고 있잖아요. 이대로는 우리 마치, 공전 주기가 다른 위성들 같아서,
151p.
전자 칩이며 구리선을 심어둔 화분 하나가 현관 근처에 놓여 있었다. 화분에 어째서 그런 것을 심었느냐고 묻자 심은 것은 아니고 퇴근하고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주머니에 그런 것들이 들어가 있을 때가 있는데 아무 곳에서 놓아두면 밟을 수도 있어서 아예 방으로 들어서면서 박아두는 것이라고 무재씨는 말했다.
154p.
전부 몇개냐고 묻자 무재씨는 열두번째의 마뜨료슈까 상반신을 옆구리에 낀 채로 마뜨료슈까 속의 마뜨료슈까를 내려다보았다. 스물아홉개 정도 있는 것 같은데요. 많네요. 계속 열까요? 기왕에 열었으니 마저 열어보죠,라고 의견이 일치해서 달각, 달각, 달각, 달각, 달각, 하고 열었다.
스물여덟개의 상반신을 마루에 늘어놓고 마지막에 남은 것을 들여다 보았다. 갈색을 띤 둥근 알맹이 같은 것이었다. 완두콩보다도 작았다. 간신히 눈썹과 입이 그려져 있었는데 갓난아기 같기도 하고 노인 같기도 한 얼굴이었다.
무재씨가 그것을 집어서 내 손바닥에 올려주었다. 말할 수 없이 가벼웠다. 얇은 껍데기를 통해서 강정처럼 빈 공간이 느껴졌다. 손바닥을 기울이자 손금을 따라 손가락 쪽으로 가볍게 굴렀다. 맥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주우려고 발을 내밀었다가 밟고 말았다. 앗.
158p.
실린 것도 몇가지 없이 박스 몇개하고 스티로폼 조각하고 비닐 같은 것들이었는데 나는 그 앞에서 그것들을 들여다보면서 이런 것들 때문에 죽는구나, 사람이 이런 것을 남기고 죽는구나, 생각하고 있다가 조그만 무언가에 옆구리를 베어 먹힌 듯한 심정이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예요.
158p.
은교씨, 나는 특별히 사후에 또다른 세계가 이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고요, 사람이란 어느 조건을 가지고 어느 상황에서 살아가건, 어느 정도로 공허한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인생에도 성질이라는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본래 허망하니, 허망하다며 유난해질 것도 없지 않은가, 하면서요.
181-182p.
불빛의 가장자리에서 벌판의 어둠이 그림자를 빨아들이고, 그림자가 어둠에 이어져, 어디까지가 그림자이고 어디부터가 어둠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마치 섬 전체가 무재씨의 그림자인 듯했다.
182p.
여기는 어쩌면 입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둠의 입, 언제고 그가 입을 다물면 무재씨고 뭐고 불빛과 더불어 합, 하고 사라질 듯했다.
184p.
따라오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따라오는 그림자 같은 것은 전혀 무섭지 않았다.
189p.
『百의 그림자』를 쓰는 동안 저는 그래서 무척 조심해야 했습니다. 은교씨와 무재씨는 조심스럽게 대화를 해야했고 저는 더 망설이면서 말을 골라야 했습니다. 조심하는 마음, 그것을 아주 많이 생각했고 그런 걸 세상에 보태고 싶었습니다. 얼마나 조심했는지, 은교씨와 무재씨의 대화에 누가 될까 싶어 책이 출간되고도 작가로 나서서 말할 기회를 아예 갖지 않았습니다.
190p.
거의 십삼년이 흐르는 동안 세상의 폭력은 더 노골적인 쪽으로 그걸 감추는 힘은 더 교묘하게 감추는 쪽으로 움직여왔습니다만, 그간 전야를 생각하는 일과 조심하는 마음을 저는 단념하지 않았습니다.
<百의 그림자>에서 얻어 꼭 써보고픈 표현과 단어

* 모골이 송연하다 : 끔찍스러워서 몸이 으쓱하고 털끝이 쭈뼛해지다.
* 근자에 : 요 얼마 되는 동안.
41p.
가마가 말이죠,라고 무재씨가 말했다. 전부 다르게 생겼대요. 언젠가 책에서 봤는데 사람마다 다르게 생겼대요. 그렇대요? 그런데도 그걸 전부 가마,라고 부르니까, 편리하기는 해도, 가마의 처지로 보자면 상당히 폭력인 거죠. 가마의 처지요? 가마의 처지로 보자면요, 뭐야, 저 '가마'라는 녀석은 애초에 나와는 닮은 구석도 없는데, 하고. 그러니까 자꾸 말할수록 들켜서 이상해지는 게 아닐까요.
43p.
나는 쇄골이 반듯한 사람이 좋습니다. 그렇군요. 좋아합니다. 쇄골을요? 은교씨를요. ......나는 쇄골이 하나도 반듯하지 않은데요. 반듯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좋은 거지요.
65p.
팔월엔 비가 내렸다. 거의 매일 내렸다. 퍼붓듯 쏟아지다가 반짝 갰다가 꾸물꾸물 어두워졌다가 툭툭 떨어지다가 다시 한차례 퍼붓고 점차 가늘어져서 그 비가 밤새 이어지는, 뒤끝 있는 날씨가 계속되었다. 이불이 묵직해서 이따금 보일러를 틀어두고 잤다.
72p.
쥐며느리가 정말 물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입이 있는데, 어째서 물지 않습니까. 입이 있다는 것은 틀림없이 무언가를 깨문다는 의미인데 말입니다.
78p.
나는 그 입도 보았습니다. 더없이 무기력한 입, 그림자에게 압도당하고 만 입, 그림자가 들락거려 혀가 검게 물드는 것을 모르고 조그맣게 벌어졌다 닫히곤 하는 그녀의 입을 보고 있었습니다.
95p.
듣고 보니 할아버지의 발 부근에서 그림자의 농도가 유난히 묽었다.
99p.
차라리,라고 생각했다. 어두운 것이 되면 이미 어두우니까, 어두운 것을 어둡다고 생각하거나, 무섭다고 생각하는 일은 없지 않을까, 아예 그렇지 않을까, 어둡고 무심한 것이 되면 어떨까, 그렇게 되고 나면 그것은 뭘까,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 모르겠다 모르겠어, 모르도록 어두워지자, 이참에,
136p.
같이 달려요. 그러고 있어요. 아뇨, 계속 엇갈리고 있잖아요. 이대로는 우리 마치, 공전 주기가 다른 위성들 같아서,
151p.
전자 칩이며 구리선을 심어둔 화분 하나가 현관 근처에 놓여 있었다. 화분에 어째서 그런 것을 심었느냐고 묻자 심은 것은 아니고 퇴근하고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주머니에 그런 것들이 들어가 있을 때가 있는데 아무 곳에서 놓아두면 밟을 수도 있어서 아예 방으로 들어서면서 박아두는 것이라고 무재씨는 말했다.
154p.
전부 몇개냐고 묻자 무재씨는 열두번째의 마뜨료슈까 상반신을 옆구리에 낀 채로 마뜨료슈까 속의 마뜨료슈까를 내려다보았다. 스물아홉개 정도 있는 것 같은데요. 많네요. 계속 열까요? 기왕에 열었으니 마저 열어보죠,라고 의견이 일치해서 달각, 달각, 달각, 달각, 달각, 하고 열었다.
스물여덟개의 상반신을 마루에 늘어놓고 마지막에 남은 것을 들여다 보았다. 갈색을 띤 둥근 알맹이 같은 것이었다. 완두콩보다도 작았다. 간신히 눈썹과 입이 그려져 있었는데 갓난아기 같기도 하고 노인 같기도 한 얼굴이었다.
무재씨가 그것을 집어서 내 손바닥에 올려주었다. 말할 수 없이 가벼웠다. 얇은 껍데기를 통해서 강정처럼 빈 공간이 느껴졌다. 손바닥을 기울이자 손금을 따라 손가락 쪽으로 가볍게 굴렀다. 맥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주우려고 발을 내밀었다가 밟고 말았다. 앗.
158p.
실린 것도 몇가지 없이 박스 몇개하고 스티로폼 조각하고 비닐 같은 것들이었는데 나는 그 앞에서 그것들을 들여다보면서 이런 것들 때문에 죽는구나, 사람이 이런 것을 남기고 죽는구나, 생각하고 있다가 조그만 무언가에 옆구리를 베어 먹힌 듯한 심정이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예요.
158p.
은교씨, 나는 특별히 사후에 또다른 세계가 이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고요, 사람이란 어느 조건을 가지고 어느 상황에서 살아가건, 어느 정도로 공허한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인생에도 성질이라는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본래 허망하니, 허망하다며 유난해질 것도 없지 않은가, 하면서요.
181-182p.
불빛의 가장자리에서 벌판의 어둠이 그림자를 빨아들이고, 그림자가 어둠에 이어져, 어디까지가 그림자이고 어디부터가 어둠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마치 섬 전체가 무재씨의 그림자인 듯했다.
182p.
여기는 어쩌면 입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둠의 입, 언제고 그가 입을 다물면 무재씨고 뭐고 불빛과 더불어 합, 하고 사라질 듯했다.
184p.
따라오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따라오는 그림자 같은 것은 전혀 무섭지 않았다.
189p.
『百의 그림자』를 쓰는 동안 저는 그래서 무척 조심해야 했습니다. 은교씨와 무재씨는 조심스럽게 대화를 해야했고 저는 더 망설이면서 말을 골라야 했습니다. 조심하는 마음, 그것을 아주 많이 생각했고 그런 걸 세상에 보태고 싶었습니다. 얼마나 조심했는지, 은교씨와 무재씨의 대화에 누가 될까 싶어 책이 출간되고도 작가로 나서서 말할 기회를 아예 갖지 않았습니다.
190p.
거의 십삼년이 흐르는 동안 세상의 폭력은 더 노골적인 쪽으로 그걸 감추는 힘은 더 교묘하게 감추는 쪽으로 움직여왔습니다만, 그간 전야를 생각하는 일과 조심하는 마음을 저는 단념하지 않았습니다.
<百의 그림자>에서 얻어 꼭 써보고픈 표현과 단어
* 모골이 송연하다 : 끔찍스러워서 몸이 으쓱하고 털끝이 쭈뼛해지다.
* 근자에 : 요 얼마 되는 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