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지현이 결혼을 일주일 앞두고 최종 완성한 축사

모순

* 축사 때 사용할 bgm. 클릭하면 유튜브 영상으로 이동합니다.


1. Ennio Morricone_Love Affair (Piano Solo)

2. Ennio Morricone_Playing Love (Piano Ver.)

3. Various Artists_Magic Waltz (피아니스트의 전설, 1998)






지현이에게.



오늘은 내가 너의 얼굴을 많이 쳐다보지 않더라도 이해해 주길 바라. 알잖아, 나 울보인 거. 축복의 글을 쓰는데 괜히 자꾸 눈물이 나더라고. 차라리 미리 다 울고 식장에서는 담담하게 읽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일단 비상책으로 너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고 읽어보기로 했어.


옷 스타일이 매달 바뀌고 외모가 매 순간 바뀌고 가치관이 매년 변하던 격동의 20대 초반을 함께 보내서 그런지 말만 10년이고 훨씬 응축된 세월을 함께 보낸 느낌이야. 난 가끔 너를 고등학교 친구로 착각하고 “걔 기억나?” 이럴 뻔하거든.



우리는 스무 살 초봄에 기숙사 문을 열고 들어온 너를 내가 맞이하며 처음 만났어. 3인실이었지만 우리 둘 말고 다른 룸메는 항상 바뀌어서 친해질 새가 없었고 우린 같은 과도 아니니까 겹치는 친구도 없어서 너와 나의 세계에는 오직 둘밖에 없었지.

밥을 먹어도 술을 마셔도 항상 둘이었고, 밤새 노래방에서 동방신기 메들리를 부를 때도 둘이었고 서로의 자취방에서 몇 시간이고 수다를 떨 때도 둘이었어.

너는 편하고 담백한 관계를 좋아했고 나는 소수의 친구와 보내는 시간을 좋아해서 우리 둘 다 그 작은 세상을 굳이 넓히려고 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



어느 날은 네가 나에게 만나는 사람이 생겼다고 했어. 그런데 이름이 지현이래. 너는 처음에 어색해서 ‘오빠'라고만 부른다고 했지만 나는 되게 재밌고 유쾌해서 좋다고 했던 거 기억나? 지현이와 지현이, 운명 같고 특별하다고 생각했어.

이번에 내가 두 사람의 신혼집에 잠깐 들렀을 때 장난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에서 애정과 안정감이 보이더라. 너랑 난 뭘 하더라도 편한 게 우선이었잖아. 아, 이제 너의 새로운 편한 자리를 찾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근데 솔직히 쪼끔 아쉽기도 한 걸 보니까 막연히 나는 우리의 작은 세계가 영원할 거라고 생각했나 봐.



지현아. 내가 좋아하는 너는 항상 지적이고 똑 부러진 어른 같았어. 아는 게 많아서 가끔은 정보를 찾으러 들린 도서관 같기도 했고 힘들 때 모든 걸 잊고 쉬러 가고 싶은 안온한 대피처 같기도 했어.

예민하고 감정 기복이 심한 나와는 다르게 언제나 여유롭고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어갈 줄 아는 네가 나에게는 너무 의지되는 존재였어.

이제 너의 남편에게는 나에게 보여주지 않았던 너의 기복적인 모습도 보여줄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나한텐 항상 네가 강단이었고 길잡이였다.

요즘 읽고 있는 철학 책에 이런 구절이 있더라. “평정과 평화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항로를 고수할 때 찾아온다.” 이지적인 네가 선택한 새로운 항로를 나는 있는 그대로 믿기로 했어.



지금 들리는 이 BGM, 혹시 알고 있어? <피아니스트의 전설>이라는 옛 영화에 나오는 음악인데, 평생 배 안에서만 살았던 천재 피아니스트가 폭풍우를 건너는 배 안에서 연주하는 곡이야.

흔들리는 배를 억지로 버텨내려던 사람들은 결코 뱃멀미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든. 그런데 주인공은 외려 피아노를 지지하는 브레이크를 풀고 배가 흔들리면 흔들리는 대로, 떠다니는 피아노에 몸을 맡기고 이 매직 왈츠를 연주해.

억지로 극복하려는 게 아니라 그 흐름에 올라타니까 즉석에서 왈츠를 연주하는 주인공도, 뱃멀미에 고생하던 주인공의 친구도 어느새 자신을 괴롭히던 풍랑을 잊고 말더라.

아마 두 사람의 배가 항로를 따라가다 보면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평화로운 파도도 비바람이 몰아치는 심통 난 파도도 만나게 될 거야. 그때마다 지혜롭게, 유연하게 항해할 수 있는 부부가 되길 바라.



초목의 싹이 돋아나는 봄날 새로운 인생의 시작을 알리게 된 두 사람. 진심으로 결혼을 축하하고, 이렇게 중요한 날 나에게 축사를 맡겨주어 고맙고, 언제나 행복만 했으면 좋겠다.

장난스러운 감사 인사말고는 한 번도 입 밖으로 내본 적 없는 것 같은데 사랑하고, 축복한다 지현아.



3월 11일

연희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