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경험을 소화시키는 시간

모순


예전에 에디터 일을 막 시작했을 때 동료가 나에게 어떤 책을 주로 읽냐고 물었다. 그때의 나는 한창 동료들에 비해 부족한 실력 탓에 자존감이 바닥일 때였는데, 일본 소설을 주로 읽어서 그런지 특유의 중심에 다가가지 못하고 주변만 빙빙 도는 화법을 닮은 것 같아 골치라고 답했다. 그녀는 나에게 소설에서는 표현하는 법만 배우고 에세이를 자주 들여다보라고 했다. 내용이 어떻든 간에 한국 에세이는 눈길 가는 제목을 참 잘 뽑는다고. 그 뒤로는 에세이뿐만 아니라 싫어하는 분야여도 한 번쯤 들여다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존경하는 교수님이 있다. 나는 섬세하고 풍성한 이야기가 담긴 소설책을 좋아하는데, 교수님은 함축된 표현과 절제된 문장의 시집을 사랑하시는 분이다. 교수님은 항상 펜을 들고 다니며 꼭 마음을 울리는 문장에 표시를 하고 견해를 덧붙이기도 하신다고 했다. 문득 주변을 둘러보니 생각이 깊고 다른 생각을 할 줄 아는 ‘멋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같은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글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더 좋은 방향을 제시한다.


모순은 좋은 경험이든 나쁜 경험이든 나도 모르는 새에 경험과 시선으로 쌓인다고 생각한다. 며칠 전 책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밑줄을 긋고 문장과 표현을 곱씹다가, 문득 지나간 동료와 교수님의 대화가 스쳐 지나갔다. 그때 즉각 배워서 꾸준히 시도한다고 했는데 이게 습관이 될 때까지는 꽤 오래 걸렸구나 싶어서. 아무래도 경험을 소화하는 데는 2년 정도가 소요되는 듯하다. 돌이켜보면 인생 전반이 그랬다. 2년 전 배웠던 지식이 이제서야 완벽하게 이해되고, 꾸준히 유지 중인 히피펌조차 2년 전보다 훨씬 잘 달라붙는다.


모순이 유독 느린 편인지는 모르겠다. 경험을 소화시키는 데에 2년이나 걸린다는 건 꽤나 비효율적인 이야기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두 살을 더 먹고서야 자연스러워진다는 말이니까. 이 때문에 모순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려고 노력한다. 시간을 낭비하기에는 2년 뒤 모순의 손에 남는 게 없을 것 같아서. 어릴 때 아빠는 알바로 한두 푼 벌 바엔 공부에 투자해서 장학금을 받으라고 했다. 공부가 돌파구였던 지극히 아빠 세대다운 말이다. 어떤 마음인지 당연히 이해하지만 모순은 반대 입장이다. 어떤 일이던 돈의 시시콜콜한 액수를 떠나 경험으로 축적되는 경험의 가치가 있다. 최근 동시에 서너 개의 일을 해치우며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쳤었다. 머리의 효율이 떨어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어딘가 계속 아파서 외주비의 60%를 병원비에 고스란히 썼다. 이걸 하면서 수백만 원이라도 떨어지면 몰라, 큰 돈을 버는 것도 아닌데 모순이 계속했던 이유는 ‘어떤 경험이라도 남는 게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혼자 있는 걸 너무 좋아하는 모순은 종종 사람들을 만나며 얻는 간접적인 시선을 놓치고 있진 않을까, 하는 자각을 할 때도 있다. 그러면 곧 영화, 책, 가끔 한 번씩 수강하는 클래스들, 다른 에디터들이 만든 컨텐츠 등을 통해서 채우고 있으니까 괜찮다고 안심한다.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정성스레 제작한 컨텐츠는 많은 고민과 깨달음을 준다. 주말에는 친구들과의 프로젝트나 외주, 사이드 프로젝트로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 보기도 한다. 원체 겁이 많은 성격이지만 혼자서 이것저것 꼭꼭 씹어먹는 건 좋다! 몇 년 뒤 다재다능한 미래의 모순을 생각하면.


혼자 나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어떤 경험이든 도전해 봤으면 좋겠다. 어떤 경험이라 함은 정말 ‘어떤 경험'이다. ‘보고 싶어요’만 찍어두고 틀어보지 않았던 오래된 영화, 많은 이가 추천했는데 ‘유행에 휩쓸리지 않겠다'는 괜한 오기에 펼쳐보지 않았던 그 책, 평소보다 두 배 돌아가는 골목길 퇴근. 하물며 집 근처 아무 가게에서 뜬금없이 알바를 시작해 봐도 좋고 스마트스토어를 열거나 독립서적을 출판해 보는 것도 있다. 취업이나 이직도 주저하지 않고 도전해 봤으면 좋겠다. 지금부터 시작하면 2년 뒤에는 그 경험을 먹고 자란 능력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잊지 말자, 내년에 초등학교를 다시 들어가 4년제 대학교까지 졸업해도 고작 40대라는걸!